흙탕물이 번져가듯 먹구름이 몰려왔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기세다. 서울 요금소 앞은 귀경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차량은 도마뱀 꼬리처럼 끝없이 생겨나고, 배기관마다 긴 한숨이 배출된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머리부터 내미는 외제 승용차와 차선 변경 차들로 정체는 극심해져 갔다. 좁은 문을 향한 경쟁을 오늘 다시 치러야 하는 건가. 이번엔 내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이가 좀 있네요. “네?” “우리 사업부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요?” “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치 단원을 잘못 알고서 문제지를 받아 든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솟았다. 면접관은 3초를 기다린 후 다음 지원자에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종일 기다린 보람도 없이 나는 3초 만에 부적격자가 된 것이다.
“임금 받을 때가 임금님인 줄 알아.” 수차례 조언했던 선배들의 말을 뒤로하고 지난해 가을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내 삶은 진부한 드라마처럼 흘러갔다. 당시엔 그만둬야 할 이유가 백 가지도 넘었는데, 1년 가까이 구직자가 돼보니 그것들은 지구 표면의 개미 같은 존재였다.
전철로 갈아타고 영등포역 대기실을 나왔다. 세찬 비가 이미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어서 나와 흠뻑 젖어보라며 아우성이다. 도로에 고인 물을 퍼붓고 지나가는 차들의 횡포가 무자비하게 느껴지던 밤, 빗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간판들을 바라보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몰려와 내 몸이 앞으로 밀려 나갔다. 결국, 우산을 펼쳐 들었다.
과일가게에 섰을 때, 내가 먹은 것이라곤 커피 두 잔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무엇이든 넣어서 허전한 속을 달래야 했다. 과일 가판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쟁 중이다. 운 좋게 하루 만에 팔려나가는 과일도 있었지만, 사나흘 지난 것들은 무르거나 검게 변하여 떨이로 전락했다. 무심한 손님들이 이것저것을 건드리다 돌아선다. 나는 구세주라도 되는 양 오렌지 한 망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껍질을 벗겨 절반을 입안에 넣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렌지 과육이 뭉그러지면서 달콤 상큼한 맛이 환상적인 기분을 자아낸 것이다.
“오렌지 맛있어요. 행복해.”
의도하지 않았던 단어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가게를 정리하던 아줌마가 잔잔한 표정을 거두고 윗니를 드러내 웃었다.
“학생 긍정적이네. 그래 그런 태도면 뭐든 잘할 거야.”
아줌마가 비닐봉지 안에 복숭아 세 알을 담아 건넨다. 청춘 별수 있나. 그렇게 나는 작은 위로를 받으며 빗속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