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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랫 Nov 03. 2020

자가면역질환도 그저 만성질환일 뿐

욕심 많고 예민해서, 복에 겹고 배불러서 걸린 병이라고?

나는 자가면역질환을 가지고 있지만, 성격도 자가면역질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많이 아팠을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할 때 기분이 나쁘기만 했는데,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난 지금은 자가면역질환을 생각하면 나와 너무 닮아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自家免疫疾病). 자신의 면역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어 질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생명체가 살아가며 면역체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해당 생명체가 그다지 경계하고 반응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반응하면서 오히려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자가면역질환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심, 더 불행하고 싶지 않다는 꿈, 성실하게 살고 싶다는 동기 등등..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질환이다. 모든 것이 과해져서 부작용이 나타난다.


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가면역 질환자들이 조금 발상을 전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 질환을 한 차례 겪은 후, 온라인을 통해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내용은 내가 어릴 적 주변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와도 결이 비슷한데, 대충 아래와 같다.

1.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 너무 욕심이 많고 예민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야.

2. 마음을 편안히 먹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렴.

3. 네가 아쉬운 게 없어서 이런 걸로라도 아픈 거 아니겠니. 가난한 애들(혹은 물리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이런 병 걸리지도 않아. 부자병이야. 네가 배가 불러서 그래.

4. 너무 열심히 살아서 아픈 거야.


주변에서는 저 말들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환자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다. 나의 경우도 몇 가지 말은 위로가 되었고, 반면 몇 가지 말은 여전히 내게 비수처럼 꽂혀서 아직도 원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 모든 말들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자가면역질환을 제외하고 만성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다. 너무 많다. 너무너무너무 너-무 많다. 비염, 축농증, 천식, 과민성 대장증후군, 위염, 결막염, 구강건조증, 심지어 탈모와 비만, 치매, 치주염, 당뇨, 고혈압... 전부. 신체적인 부분만 대충 나열해도 이렇고, 공황이나 우울증, 조울증 같은 정신질환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많다.


원인은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특정한 외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저런 사람들한테는 '넌 욕심이 많고 예민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너는 부자병에 걸렸다'라며 핀잔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스트레스받아서 좀 아픈가 보네. 불편하겠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가면역 질환자도 똑같다. 저들과 다른 선상에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나를 '일반'에서 분리해버리는 태도가, 적극적인 처치를 위한 나의 태도와 치료자들의 태도를 방해한다. '비염은 쉽게 치료되는데, 자가면역질환은 쉽게 치료 안되지. 자가면역질환은 '다른 병'과 다르니까'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가면역질환은 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한계를 규정하게 한다. 그렇게 규정된 한계는 정말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자가면역질환이 앞서 말한 다른 만성질환들과 대처 방식이 달라지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한 큐에 듣는 약이 없다'라는 것. 사실 다른 만성질환들도 엄밀히 말하면 '한 큐'에 듣는 약은 아니다. 사실 다른 질환들은 항생제와 소염제를 일주일쯤 먹어서 비염이나 축농증을 가시게 한다거나, 소화제나 안약을 달고 살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증상들을 다루는 것이 가능한 정도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질환의 경우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들이 '갑자기' 터졌을 때 그 상황을 수습하는 약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자가면역질환은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한결같이' '늘' 불편하고,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는 약들이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만성질환도 한결같이 늘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그 질환들은 편하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자가면역질환에 이게 좋아요~'라든가, '이런 걸 먹고 이런 걸 하시면 낫는대요~'라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질환을 겪느라 너무 힘들어서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정말 어렵고 괴롭겠지만, 조금만 시각을 바꿔보았으면 좋겠다. '다른 질환과 너무 다른 독특하고 희귀한 병이라 나는 고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가면역 질환자와 축농증 환자는, 축농증 환자의 절대 수가 조금 더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가면역질환은 '희귀'하지 않다. 류머티즘, 아토피, 건선, 섬유근육통... 주변에 이런 질환을 겪는 사람을 보는 일은 '희귀하지'않다. 질환을 겪는 사람이 '이거 희귀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해야, '이거 아무것도 아닌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나도 이거 잘 관리하고 극복해낼 수 있어'라는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다.


'긍정적인 마음이 암도 이겨낸대'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암 환자들은 항암치료도 하고 약도 많이 먹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도 노력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치료도,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해야 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P.S. 자가면역 질환자만 열심히 산거 아니다. 세상 사람들 다 열심히 산다. 그래서 다 만성질환이 있고 다들 불편함을 떠안고 몸을 달래 가며 꾸역꾸역, 원래는 스무 살 서른 살쯤 되면 죽었을 인간의 인생을 팔십, 구십까지 끌고 살아간다. 그저 의학이 발달한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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