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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랫 Sep 19. 2020

이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철학의 위안,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X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을 읽었다.


철학의 위안을 읽고 나서는 몽테뉴의 '수상록',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 등을 읽어보고 싶긴 한데, 어렵고 지루할까 봐(...) 완독 자신은 없다.


 멀티앑가즘에는 공연과 책만 섞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책과 책을 읽고서 감상문을 써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소재로 삼아보았다. '철학의 위안'의 경우 애초에 알랭 드 보통이 여러 사상가들의 다양한 저작을 읽고서 소화시킨 것을 그의 능력으로 소화시켜둔 내용이라, 철학자들의 1차 저작물에 대한 감상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은 '감상문의 감상문'이라고 해야 하려나. (ㅋㅋ)

알랭 드 보통 - 철학의 위안 (청미래)

부적절한 것은 없다


처음에 '부적절한 존재'라고 하길래, '배다른(혹은 씨 다른) 형제자매들이나 불륜 상대를 말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적절한' 존재들이란, (보편적으로) '이성'이라는 개념의 대척점에 있는 것을 지칭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이나 성욕 등의 본능, 그리고 '상식적'이라고 생각되지 못하는 것들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본능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식욕은 늘 절제하는 것이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을수록 식욕은 성욕과 그 뿌리를 나란히 하며, '식욕의 절제가 자기 관리라면, 성욕의 절제도 자기 관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해하겠지만, 이 생각 때문에 나는 이성을 만나는 자리가 너무나 불편하고, 그 때문에 이성과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교류하는 일(연애뿐 아니라 친목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이 무척 드물다. 이러한 상황이 몇 년 동안 지속되면서, 앞으로 삶을 꾸려나감에 있어서 나는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고, 그렇게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쇼펜하우어 '사랑은 없다', 정말 대단한 책을 쓰셨네요... 읽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쿨럭)

'사랑'의 이유는 오로지 성욕이며, 성욕은 종족번식 본능에 뿌리를 둔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에 대한 정의를 읽으면서는 '와,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라며 위로받았다.) 그렇다면 내게 '연애'란 성욕이라는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본능이 '절제되어야 할 것'이라면, 본능은 결국 나쁘지는 않더라도 '좋지 않은 것'이고, 종족번식이든, 성욕이든, 사랑받고 싶은 욕구든 다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호감 가는 이성을 보고 '와 저 사람 멋있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창피했고,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를 좋아하기 때문에(ㅋㅋ), 앞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좋아하려면 어떤 이성을 보아도 호감을 느끼지 말아야 했고, 누군가가 다가오면 물리쳐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본능'을 '절제'하다못해,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스스로를 부정하다 보니 앞에 언급하듯 '앞이 캄캄'해졌는데, 몽테뉴는 이런 내게 "괴로움 중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라는 핵직구를 날렸다. 식욕, 성욕 모두 결국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조차도 '나의 모습'의 일부이니, 이를 경멸하지 말고, 고민이 된다면 고민을 하되,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는 이야기로도 들려서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에스터 페렐 -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들(욕망과 결핍, 상처와 치유에 관한 불륜의 심리학) // 하단에 '알랭 드 보통'의 추천사가 있는 것은 우연이다. ㅎㅎ

몽테뉴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중에서는 결코 비인간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온전한 형태의 인간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철학의 위안에서는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라고 했지만, 몽테뉴의 말에 따르면 '부적절한 존재'자체가 없다는 얘기다. 문득, 얼마 전 불륜 전문 상담가인 에스터 퍼렐이라는 작가가 쓴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바람을 피우고, 불륜을 저지른 연인, 부부들의 다양한 케이스를 통해 '사랑'이 무엇이고, 불륜과 외도는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불륜과 외도로 생겨난 상처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극복해내는지를 엮은 책이다. 불륜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아무리 말하고 손가락질해봤자,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 이상, '한 눈을 파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과연 이 '부적절한' 행위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1. '불륜'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보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이 나으니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아예 만나지 않는다.

2. '불륜'은 부적절하다고 믿고 거기에 손가락질만 하며,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나도 외도하지 않으리라고 근거 없이 믿는다.

3. 인간이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되, 내가 불륜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마 누군가는 2번의 선택을 하거나 3번의 선택을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늘 1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목표를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ㅋㅋ) 앞서 말한 대로 무엇을 선택하든 적절하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그동안의 선택으로 인해 앞이 캄캄하다면, 내가 언제든 이 선택을 바꾸는 것도 적절하다. 삶에 정답이란 없고, 몽테뉴가 말한 대로 부적절한 것은 없으니까. 선택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나 자신이고,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에 따르는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자격미달이라는 것'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는 나의 기준을 바꾸고 편안해지고 싶다. 몽테뉴의 이야기는 나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위로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나 살인자들도 그렇다면 적절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났는데,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절하다는 것이, '그들은 무고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은 존재한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이 적절하니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아무리 부적절하다고 해봐야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므로, 현실을 똑바로 보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미의 이야기다. '불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노력해야 하며, 불륜에 휘말린다면 이게 잘못이네 아니네를 따지기보다 이를 앞으로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주관


이성과 본능을 나누고, 본능은 절제되다 못해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나의 기준이었다. 내가 보고 자란 세상에서 내가 영향을 받았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이를 기준으로 삼겠다고 (무의식 중에)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들이 모여 한 사람의 '주관'이 된다. 그리고 이 주관이 너무 센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의 소크라테스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알랭 드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인기가 없어' 사형당한 것으로 설명을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죽을 무렵 이 때문에 슬퍼하고 비통해 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인기가 없던 것도 아니지 싶다. 소크라테스는 인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받은'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던 '기준'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행보 상, (그는 의도치 않았대도) '비주류의 반항'처럼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말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을 뿐인데, 그 때문에 자꾸 상대의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들쑤시게 되고, 이런 것이 오해의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는 '인기없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 어떤 기준도 완벽하고 완전한 기준은 없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용기'는 '전진'일 수도 있고, '후퇴'일 수도 있다. 용기를 '전진'으로만 정의하든, '후퇴'로만 정의하든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삶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거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과연 나의 결정에 오류가 없는가'라는 반추가 반드시 필요하다.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것도 아니고 삶을 많이 경험하고 겪어봐야 가능한 것이므로 시간도 많이 걸린다. 결국 가치관과 기준을 정립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오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선택의 근거를 묻고, 그들의 상황 파악 능력을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추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텐데,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피곤한 사람이라고 평가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피곤함을 넘어서서 기존의 관습에 대하여 도전하는 위험한 반항자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콤플렉스 등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털어서 '수상록'을 집필했다.

그렇지만, '지성'이라는 것이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무엇인지 안다거나,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느냐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봉착하는 도전, 이를테면 사랑, 섹스, 질병, 죽음, 어린이, 돈, 야망에 관한 질문'에 답을 풀어내는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끊임없이 이 피곤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고민하는 대부분의 것은 앞서 말한 이 주제들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대답하는 것을 '피곤해', '귀찮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유 있고 편안한'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인간의 완성에 필요한 요소들을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는 두루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좋은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의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스스로의 몫이다.)

니체의 말이라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이 핑돌았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고민이 생긴다면, 그게 사소하고 쓸데없어 보인 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비록 지혜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둔함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취를 이룬 삶'이니까. 그리고 그 고민이 너무 크고 해결될 수 없는 일처럼 보인 대도 걱정하지 말자. '우리에게 가장 큰 환희를 주는 원천들은 역시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원천들에 바짝 다가서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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