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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구루 Nov 20. 2023

스필만이라, 피아니스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군

영화 <피아니스트>

[전쟁 속 예술가, 블라덱]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덱. 그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두 번 다신 있어선 안 되는 불행을 경험한다.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법은 그의 가족 숨통을 조이고, 결국 강제 이주를 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에 사는 예술가 블라덱. 차별받는 예술가의 삶은 어떨까.

자네는 예술가니까 사람들에게 용기를 줘야지.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이렇다. 용기를 주는 직업, 감성으로 다가가는 예술. 그런데 이성도 감정도 버려야 살 수 있는 전쟁 속에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 제한되고 인종으로 차별받을 때, 그곳에서 피어나는 악상을 느껴야 진정한 예술가라고 말한다면 참 안타까운 직업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전쟁 속에선 예술가는 없다. 그저 죽이는 자와 죽는 자만 존재한다.

 사실 차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차별’은 나와 상대가 동등하고, 동등해야 마땅하다는 전제하에 존재하지만, 블라덱에겐 동등과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이라는 단어를 쓰는 나를 보다가 문득 정말 ‘상대적’으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안주하고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차별을 괄시할 생각은 없다. 나아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인간이니까)



[‘왜’가 쓸모없는 전쟁]

 영화를 보면서 무수한 ‘왜’가 속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끝내 스스로 던진 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했다. 나는 역사 시간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려고 했던 이유를 형식적으로 배웠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그 형식적이고 대외적인 이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나름대로 ‘왜’에 답하기 위해 만든 것 같다.



[그로테스크한 예술]

 블라덱은 자기 동료들이 투쟁하는 모습과 소리와 그 충격을 들으며 은신처에서 생활한다. 그는 잠들며 멜로디를 생각하는데, 이때 정말 그로테스크했다. 설마 그 소리와 진동을 느끼며 악상을 그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켜봤다.

그는 새로운 악상을 그렸을까?

아니면 멜로디를 느끼며 현실 도피를 한 것일까?

 나는 연기를 배우고 있다. 연기를 배우면서 내가 어떠한 감정에 휩싸여 괴로워할 때 ‘이 감정을 기억해서 나중에 연기에 써먹어야지’하는 생각을 왕왕한다. 그런 나를 발견하게 되면 약간의 혐오감까지 생길 정도다. 나쁜 일을 연기에 써먹을 경험으로 치부하며 넘길 땐 인생에 있어 순기능을 하는 것 같지만, 확실히 그로테스크한 점이 없잖아 있다.

 블라덱도 그랬을 것 같다. 악상을 생각하며 현실을 회피함과 동시에 그렇게 도망치려는 자신이 혐오스럽고,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조차 피아노를 열망하는 자신의 모순된 태도에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예술가의 생존]

블라덱: 독일 놈들이든 누구든 아무도 몰랐을 거야. 유대인이 맞서 싸우다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저래서 얻는 게 뭐지?

야니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말을 하다니. 존엄성을 지키고 죽은 거야. 그거면 됐지. 얻는 건 또 있어. 폴란드 사람들도 일어날 거야. 준비는 다 됐어. 우리도 싸울 거야. 지켜봐


 인간성이 점점 사그라드는 블라덱을 잡아준 야니나. 생각해 보면 블라덱을 도와준 사람들이 많다. 사실 블라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일 뿐, 동포의 투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런 태도를 취한다. 자기 고향에 남고 싶어 했고, 맞서 싸울 시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며 한발 물러난다.

 물론 그의 행동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투쟁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나아갈 시간, 미래보다는 당장의 음식, 생존이 더 중요하니까. 오히려 그런 그를 포용한 수많은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조금은 같이 싸우자고 말하고 싶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같은 동포의 생존을 도와주는 것뿐이다.



[살아남은 예술가]

 예전 유대인 지역이었던 폐허에 들어가 살게 된 블라덱. 음식을 찾다 피클을 발견하고 그걸 열려고 애를 쓸 때, 독일 군인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와 마주치게 된다.


호젠펠트: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블라덱: 저는… 이 캔을 따려고…

호젠펠트: 여기에 사는 건가? 아니면 일을 하는 건가?

블라덱: 아니요

호젠펠트: 직업이 뭔데

블라덱: 그러니까… 피아니스트였어요…

호젠펠트: 피아니스트? 따라와 봐. 연주해 봐


 군인에 의해 피아노를 치게 된 블라덱. 그 장면이 성스러워 보이는 한편, 너무 애처롭게 보인다. 얼마나 무서울까. 저 군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채, 혹여 건반 하나 틀렸다고 총을 싸버리면 어쩌지, 아니면 들을 거 다 듣고 싱겁다고 죽이면 어쩌지, 죽는다면 어떻게 죽일까 온갖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상상은 상상이고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독일 군인이니까.


[오늘의 질문]

살아남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영화 말미의 블라덱은 인간 존엄이 소멸된 채 생존을 위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독일이 이겼다면, 그래서 블라덱이 다시 한 번 붙잡힌다면, 생명줄을 붙잡힌 채 그들의 명령 아래 살아가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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