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모든 단어, 모든 문장을 완벽히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을 시키다 보면 우스꽝스럽거나 터무니없는 말이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전문 번역가는 아니지만 회사에서 업무상 외국어로 작성된 문서를 간접 인용을 하기도 하고 거의 그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대체 이 말은 어떻게 옮겨야 하나’ 싶은 상황을 자주 겪었다. 몇 번은 외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하는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도 했는데 그들은 자신이 외국어로 이해하는 바를 우리말로 옮기기를 나보다도 어려워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애초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 없이 외국어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익숙한 것일수록 다른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1+1이 왜 2인지를 증명하라는 식의 문제처럼.
넓게 보면 번역이나 통역은 낯선 언어(것)를 낯익은 언어(것)로 옮기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소통을 위한 공정-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 간에도 어떤 통·번역이 필요하다. 특히나 마음(속의 것)을 전달하는 일은 설명보다 번역에 가깝다.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남의 마음을 읽는 데 사용하는 ‘문자표’ 자체가 확신할 수 없는 도구인 탓에 그 작업은 대개 암호 해독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 그리고 마음을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외국어 번역과 마찬가지로 본심(원문)의 일부가 손실되거나 손상되거나 변형되는 사태는 피하기 어렵다. 이렇듯 불완전한 통·번역을 통해서도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4)라는 영화 제목은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독방을 찾는 남자, 독방에 갇힌 여자
일본 도쿄 거리에 서 있는 샬롯(오른쪽)과 밥.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
이 영화의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이다. 직역하면 ‘번역(통역) 중에 잃어버린’ 정도가 된다. 무엇을 잃었다는 것일까. 어떤 표현이나 의미일 수도, 길이나 방향일 수도, 마음속의 무엇일 수도 있다. 아마 그 원제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유도하면서 저 모든 의미(해석 가능성)를 포괄하려 했을 것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이 영화에는 외로운 두 남녀가 나온다.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샬롯(스칼렛 요한슨). 할리우드 영화배우인 중년 밥은 광고 촬영을 위해, 갓 대학을 졸업한 결혼 2년차 샬롯은 출장에 나선 사진작가 남편을 따라 일본 도쿄에 왔다. 두 미국인은 같은 이국땅에서 각자 다른 유형으로 외로워한다. 구별하자면 밥은 ‘외로움을 느끼는’ 쪽, 샬롯은 ‘외로움을 겪는’ 쪽인데 양쪽 다 그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외롭다’는 ‘괴롭다’에 가깝게 그려진다.
밥은 “처자식에게서 벗어나고 돈도 벌 겸” 미국을 떠나왔지만 사방의 모든 것이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도쿄라는 공간이 불편하다. 그의 눈에 일본은 낯설고 괴상하기까지 하다. 도시는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색색의 간판으로 요란하고, 좁은 엘리베이터는 무표정한 동양인으로 가득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쇼 프로그램 진행자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시끄럽게 떠든다. 채널을 돌리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게 되는데 우스꽝스럽게 더빙된 일본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전원을 꺼버린다. 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에 둘러싸여 있고, 통역은 열 마디 일본어를 한 마디 영어로만 옮기는 수준이다.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낯선 현지인으로 가득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밥.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
밥은 스스로 벽을 치고 소통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현지인들의 환대를 달가워하지 않고, 자신을 알아보고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서양인들도 피한다. 누구와 이야기할 생각도, 낯선 것들을 이해해볼 마음도 없다. 그저 낯선 땅의 모든 것이 고역스러울 뿐이다. 밥은 그것들을 피해 커다란 호텔방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호텔 바 구석에서 위스키를 마시거나 한밤중에 텅 빈 호텔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달린다. 그는 호텔을 벗어나지 않고, 잠들지 못한다.
샬롯은 대화를 거절당하며 ‘고독’이라는 독방으로 내몰리는 쪽이다. 밥과 달리 샬롯에게 도쿄라는 장소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샬롯의 외로움은 낯선 공간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로 인한 곤경이다. 거의 유일한 말동무인 남편은 일에 골몰한 채 샬롯에게 무관심하다. 좁은 호텔방에 함께 있는 짧은 동안에도 작업 도구를 챙기며 일 얘기만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거기에 아내(의 일상에 대한 궁금함 같은 것)는 없다. 의견을 묻듯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일을 나갈 때마다 “사랑해”라며 입 맞추지만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오른쪽)이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인 여배우와 반갑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샬롯(가운데).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
남편과 한 침대에 누워서도 샬롯은 혼자 있을 때와 다름없이 외로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든 남편 옆에서 내내 뒤척이며 잠들지 못한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려고 도시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샬롯은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하루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모든 게 공허하다”고 하소연하는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는 샬롯에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통화 말미에는 “또 연락하자”고 말하고 “사랑해”라고 인사한다. 샬롯은 그렇게 사방이 무관심이라는 벽으로 가로막힌 골방에 갇힌 처지다.
‘외로움’이라는 공통어
영화는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밥과 샬롯이 우연히 마주치기를 반복하다 외로움을 공감대로 가까워지고 서로를 통해 숨통을 트는 방향으로 흐른다. 밥은 샬롯과 진지하게 대화하며 독방을 허물어주고, 샬롯은 밥을 호텔 밖으로 이끌며 독방에서 꺼내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골방(고독)을 오가며 자신의 골방에서 벗어난다. 각자 처한 상황과 세대 같은 차이를 넘어 낯선 길을 동행하는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는 이들의 관계를 남녀 간의 그 무엇으로만 말해버리는 것은 부족한 해설이다. “로맨스적”이라고 말할 만한 대목이 있지만 “이건 로맨스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새로 지어 붙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그래서 아쉽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원제: High Fidelity)라고 옮겨진 외화 제목을 참조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저 제목은 담백하면서 미묘한 데가 있는 밥과 샬롯의 다층적 관계를 자꾸만 한쪽(남녀관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자칫 ‘각자 배우자가 있는 남녀가 외국에서 외로움을 못 견뎌 정을 통한 이야기’로 요약돼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본 도쿄의 호텔 바에서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샬롯(왼쪽)과 밥.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
두 사람이 가까워진 뒤-‘친구가 된 뒤’라고 하자-에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샬롯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결혼생활을 해온 밥에게 “결혼생활은 할수록 나아져요?”라고 묻고 밥은 “쉽지 않아”라고 답한다. 사는 게 힘든데 나이 들면 나아지느냐는 물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가 “그래, 나아져”라고 서둘러 정정하지만 진심은 수습되지 않는다. 20대의 샬롯과 50대의 밥은 지금 같은 곳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똑같이 외로워하고 있다. 이 사실은 외로움이 나이와 무관하게 저마다의 시기에 겪는 문제이며 성숙이나 미숙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외로움은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 함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통·번역(서로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괴롭)다. 그렇다고 그 통역이나 번역이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다. 밥과 샬롯은 자신의 사정이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외로움’이라는 공통된 마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밥에게 ‘당장 떠나고 싶은 곳’이었던 도쿄는 샬롯을 알게 된 뒤 ‘떠나기 싫은 곳’이 된다. 마음을 나눌 한 사람만 있어도 낯선 세상은 꽤 괜찮은 곳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