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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너머 Nov 19. 2023

인생 첫 깁스

병원을 회피했더니 다리가 부러졌다

"엄마 오늘은 참 신기한 날이었어. 인생 첫 깁스를 했잖아, 처음으로 휠체어도 타보고 그래도  재밌었어."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돌아와서 겸이가 한 말이었다.     


페낭에서의 마지막 미드텀브레이크 일주일을 겸이는 원없이 놀았다. 아빠 직장을 따라 베트남으로 떠났던 친구가 마침 텀브레이크가 같아서 페낭에 놀러왔다. 한국 친구들이 다같이 모여 세계 가장 긴 워터슬라이드가 있는 이스케이프에서 하루를 신나게 놀고 온 아이는 다음 날 저녁엔 친구가 묵는 호텔에 가서 친구와 같이 자고 그 다음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도 못오고 키사이드에 사는 다른 친구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낮부터 놀다가 슬립오버까지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다 헤어지기로 한 아이들이 그래도 아쉬워해서 다같이 로터스에 있는 키즈카페로 가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집으로 흩어질 예정이었다. 쓰다보니 진짜 원없이 과하게 놀긴 했구나 싶다.       


아이와 하루종일 지지고 볶을 생각에 일주일을 어찌 보내나 싶었는데, 거의 사흘간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집에서 책을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진동벨이 울리는 소리에 전화를 받으니 겸이가 놀다가 다쳐서 다리가 부었다는 친구 엄마의 전화였다. 키즈카페에 도착해서 보니 아이 종아리가 멀리서도 볼록 올라온 게 보였다. 아이는 잘 걷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나를 보자 눈물을 흘렸다. 친구 엄마도 차를 안 가지고 왔다는 말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배드민턴 강습을 받던 엄마들 넷이 강습을 중간에 끝내고 로터스로 달려왔다.      


 놀이방 남자 직원의 도움을 받아 1층으로 내려와 KFC 앞에 의자에 앉으니 아이가 좀 진정이 되었다. 그 와중에 배가 고프다 하여 햄버거를 시켜놓고 병원엘 가도 지금 점심 시간일 테니 일단 햄버거를 먹였다. 그 동안에 집에 가서 씻고 아이를 태우러 다시 빈이 엄마가 오자 좀 안정이 된 아이는 병원에 안가고 일단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혔다. 나도 내심 집에 가서 좀 쉬면서 부기가 빠지는지 상태를 지켜보고 병원엘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대가 끊어졌던지 좀 심하면 뼈에 금이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정형외과 치료라는게 깁스를 하고 뼈가 붙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일단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사실 그동안 크게 아픈 적도 없었지만 영어로 병원에서 의사소통을 할 일에 대한 부담으로 웬만큼 아프면 병원에 안가고 집에서 버티곤 했다. 더구나 엑스레이까지 찍고 치료하려면 큰 병원으로 가야할텐데, 웬만하면 피해보고 싶었다.      


 집에 와서 진통제를 먹으니 통증이 좀 가라앉은 아이가 병원에 안가도 될 것 같다고 하여 부기가 오른 다리에 진통 효과가 있는 오일을 바르고 부드럽게 맛사지를 해 주니 신기하게 볼록 올라왔던 부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발목도 잘 돌아가고 부기가 빠지자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아이는 이삼일 간 진통제를 먹으며 견딜만 해지자 나도 마음이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기울어 병원엘 안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통제가 떨어지면 계속 통증을 호소해서 텀브레이크가 끝나고 학교에 등교하는 월요일이 다가오자 학교에 가려면 병원에 가서 깁스라도 하고 아무래도 엑스레이를 찍어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일요일에 큰 병원을 가려고 하니 여러가지가 예약도 안되고 어려워 결국 월요일로 미뤄서 아침 일찍 집에서 멀지않은 떼자니라는 조그만 동네병원으로 가는데 아무래도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정강이 뼈 가운데가 똑 부러져 있었다. 의사가 소견서를 써 줄테니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정형외과가 있는 전문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엑스레이 사진에서 부러진 정강이뼈를 보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나 반성이 되고 아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여러 사람들이 추천해준 '어드밴티스트'라는 조지타운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서 깁스를 했다.

아침에 승겸이 상태를 물었던 준이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더니 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갔다. 준이 아빠까지 와서 의사의 말을 같이 들어주고 깁스하는 걸 보다가 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 먼저 보냈다. 그랩을 타고 가겠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굳이 다시 아이들까지 태우고 병원으로 우리를 데리러 와 줬다. 차가 없으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게 되어 민망한 마음이 많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하여 돌아오는 길에 로터스에 들러 햄버거를 먹고 집으로 왔다. 의사에게 물으니 3주 정도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라 뼈가 빨리 붙는구나 싶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일단 일주일은 집에서 쉬고 다음 주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메일을 담임인 미스 잭슨에게 보냈더니 바로 학교 비서인 샤론이 전화를 했다. 교장샘인 Ms 에타가 승겸이 등교문제로 미팅을 하고 싶다고 금요일 아침에 학교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는 준이네 차를 얻어타고 학교에 가서 교장샘과 겸이 담임인 잭슨샘과 미팅을 했다.

승겸이 교실이 2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고 점심을 먹으러 학교식당까지 목발을 짚고 다니기엔 위험부담이 커서 결국 점심 전까지만 수업을 받고 하교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대신에 오전 수업을 영어 수학 위주로 시간표를 조정해 주고 다른 교실로 이동해서 받는 수업도 선생님들이 승겸이 교실로 와서 수업을 해 주셨다. 일주일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집에서 누워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오전에라도 등교를 하게 되니 그거라도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대신에 아이를 아침에 데려다 주고 한두 시간 후에 다시 데려오는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3주 정도라고 하던 깁스는 5주가 지나서 잠시 풀었다. 엑스레이 상 뼈는 잘 붙고 있지만 의사는 이주 정도 더 하고 있는게 좋겠다고 했지만 나와 겸이가 굳이 풀겠다고 해서 처치실에 가서 허벅지까지 하고 있던 긴 깁스를 드디어 잘라냈다. 그런데 깁스가 벗겨지는 순간 무릎에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며 아이가 겁을 먹고 다시 깁스를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의사를 보러 가서 깁스를 다시 하고 싶다고 하자 잘 생각했다고 하면서 다시 새 깁스를 했다. 보험도 안 들어서 25만원이 다시 나갔다.


이제 깁스 한 지 6주차, 다음 주에 깁스를 풀어도 한동안 목발은 사용해야 된다니 12월 초 방학을 하기 전까지 오전 수업만 하고 오게 생겼다.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던 아이라서 12월 초에 있는 페낭 게임즈에 텐비타이거 선수로 마지막 참가를 하고 싶었던 아이의 꿈이 좌절된게 가장 아쉽다. 이번에 깁스를 풀면 수영대회는 참가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사라졌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놀기 좋아하고 운동 좋아해서 집에 한시도 붙어있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꼼짝없이 집에만 있게 되니 처음에는 나도 아이도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씩 적응이 되자 책도 들여다보게 되고(하루종일 휴대폰만 보기가 미안하니 어쩔수 없이 ) 늘 떠 있던 기운이 좀 가라앉아 차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단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겸이는 깁스와 목발을 하고 다니면서 갑자기 학교에서 인싸가 되었다. 깁스를 하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처음보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의 눈길이 아이에게 쏠렸다. 선생님들과 다른 학년의 아이들도 이제 승겸이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토요일마다 가는 한글학교에도 오래 쉴 수 없어 보냈더니 모든 아이들(특히 어린 동생들) 의 관심을 받고 쉬는 시간마다 깁스한 형을 보러 교실에 찾아왔다나 어쨌다나. 덕분에 인기 최고였다는 선생님의 어색해 하는 문자도 받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생활에 많은 변화가 왔다. 날마다 픽드랍을 하기위해 학교에 가던 엄마들과 달리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학교에 가서 사실 담임 선생님도 내 얼굴을 잘 몰랐었는데, 겸이를 매일 아침 교실까지 데려다 놓고 수업이 끝나면 밖에서 기다리다가 부축해서 내려오니, 승겸이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이나 학교 직원들과 본의 아니게 매일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고, 사람들 만나는 일을 웬만하면 피하고 조용히 지내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떤 식이든 내가 해야 할 일은 치르게 되어 있나보다 싶은 생각도 들고, 아이가 아프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기도 하면서 배우고 느끼는 것도 많은 날들이다. 페낭을 떠나기 전 마지막 한 달쯤은 차를 빌려서 못가본 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아이 픽드랍을 위해 차가 생겼지만, 학교에 다녀오는 일 말고는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일, 더 겸손하게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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