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8시 전에 아침 운동을 나가면서 엄마께 전화를 드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엄마 뭐하세요?”
“나는 밭에 있지. 오늘은 고추를 좀 딴다.”
“저는 조금 전에 일어났는데요. 엄마는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
“오늘은 네 시 반. 다섯 시에 밭에 나왔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도 마이 못 해.”
이런 날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엄마는 지금 근무 중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오백 평 밭농사를 혼자 짓는 여든 살 엄마는 다섯 시에 밭에 출근해 여덟 시가 조금 넘으면 퇴근하신다. 사장님도 엄마, 직원도 엄마인 1인 기업이다.
엄마는 이 시간에 열무씨를 뿌리고, 옥수수밭에 비료를 주고, 하우스 밖 노지에서 자라는 참깨에 줄을 치신다. 계절마다 하는 일은 조금씩 달라진다. 하우스에 있는 깻모에 물을 줄 때는 통화를 조금 길게 해도 괜찮다. 두 손을 쓰는 일이 아니라 한 손으로 호스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나와 통화를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신체 알람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신체 알람은 새벽 다섯 시에 엄마를 깨운다.
“엄마, 어떻게 그 시간에 눈이 떠져요?”
“나는 일찍 자니까 그렇지. 얼마 전에는 세 시에 깼는데 잠이 안 와서 혼났어.”
해가 긴 봄, 여름, 가을에는 그렇게 이르게 일어나도 밖에 나가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해 뜨는 시간이 일곱 시가 넘는 겨울에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도 즐기지 않는 엄마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실까. 생각해 보다가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혼자 친정에 갔는데, 이른 시간에 일어난 엄마는 유튜브를 켜고 읽어주는 드라마를 듣고 계셨다. 왜 그런 걸 보시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내가 엄마의 껌껌한 새벽을 대신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은 그저 이 겨울이 빨리 가기를 바랄 뿐이다. 해 뜨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빙판이 되는 날이 사라지고, 이른 새벽에 일어난 엄마가 옷을 차려 입고 제방둑을 걸으며 아침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 하우스에서 작물들이 엄마의 손길을 받아 조금씩 자라는 시간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는 활동을 하실 때 목소리에 활력이 있으시다. 그런 엄마의 농사를 말릴 수는 없다. 다만 한 해에 몇 고랑씩 스스로 농사를 줄이시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엄마가 농사를 줄인 땅에는 다른 사람들의 작물이 자란다. 읍내 사는 친구가 열무를 키우고 싶은데 땅이 없다고 하면 두어 고랑을 내어 주고, 윗마을 이웃이 고추를 심고 싶다 하면 또 두어 고랑을 내어 주신다. 그 인심은 나도 배워서,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날이 빨리 풀려서
엄마의 아침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둑방 옆 천을 날아가는 학이 인사를 건네고,
작물들이 “농부님, 농부님―” 하고 불러대는 시간이
조금 더 빨리 오면 좋겠다.
밭 고랑에 비료 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