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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Dec 11. 2020

다 때가 있다.

언제 선택할 것인가.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어제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행동을 꺼내어 놓는 순간이면 우리 아이가 특출 난 것은 아닌가 싶어 당장이라도 영재교육원을 알아봐야 하나 싶다가도, 이맘때쯤이면 해야 한다는 어떤 통과 의례 같은 행위를 선뜻 보여주지 않는 나날이 쌓이기라도 한다면 우리 아이가 좀 늦자라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걱정스러운 마음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면,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다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진정시켜본다.


중고등학생, 아니 심지어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이성에 눈을 뜨는 아이들이 있다. 풋내 나는 사랑놀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진지해서, 자칫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놀리기라도 했다가는 이글거리는 아이의 눈빛을 마주하며 겸연쩍게 뒤통수를 긁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편지에는 때때로 성인이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섬세한 감성이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성인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순수함이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희생적인 마음은 어쩌면 성인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고 고결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일찍 사랑을 배웠다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다른 사랑에 대한 완벽함을 담보해 주는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두 눈이 온전히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렇지 않은 때가 많다. 이치를 깨닫는 것과 안구 인지능력 사이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은 탓이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일찍 이성에 눈을 떠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성들과 교류를 이어왔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 최고의 짝을 만날 확률이 높아질까? 그렇다면 반대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데이트를 못해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원하는 짝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많이 만나봐야 보는 눈이 생겨, 나와 맞지 않는 혹은 피해야 하는 사람을 걸러내는 통찰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과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서로의 허점을 겨누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것에 눈을 뜬다.


 때로는 일찍, 혹은 늦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평생 눈을 뜨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자아, 사랑, 용서, 경제관념, 인간관계, 진로, 직업관, 음악, 미술, 역사, 철학, 과학, 신학, 이런 것들을 총칭하여 나의 안과 밖을 둘러보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면 인생은 세계관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있는가, 어떤 것들에 새롭게 눈을 뜨고 있으며 얼마만큼 그것을 깊이 바라보고 있는가.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무엇이고 이제는 무엇으로부터 관심을 거두어들이고 있는가.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모든 것을 알 수도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과 "다 때가 있다"는 말은 어찌 보면 일맥상통한다. "때"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과 동시에 시작되는 시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순간이 바로 때가 무르익은 순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시기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기로 결심이 선 순간을 의미한다.


조급해하지 말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던 사람이 고기를 먹기로 결심하는 순간, 오래도록 먹어온 놈보다 더 잘 먹는 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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