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해한다는 것은 슬퍼본 적이 있다는 말과 같다

불행이 낳은 치료제

by 정 호

이해력은 경험하지 않은 것까지도 알아챌 수 있는 인지적 차원의 능력을 뜻하지만, 이해심은 언제나 경험의 경계 어느 부분까지만 확장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한 정서적 차원의 능력이다.

그래서 가끔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며 쉽사리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주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난 저 마음에 공감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타인의 눈에는 나 역시도 비슷한 불행을 품어봤던 사람으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네가 뭘 알아.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 내게 무해한 사람 -


아직도 삶을 대함에 있어 성숙한 태도를 갖추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지금보다 더욱 마음이 여물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것쯤 나는 다 이해해", "고생도 안 해본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어"라는 식으로 생각을 이어갔던 적이 있다. 부끄럽게도 불행이 마치 어떤 특권이라도 된 것 마냥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제는 그런 마음에서 벗어났지만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어떤 힘겨운 상황들을 쉽게 이해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문득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해심은 곧 공감하는 마음으로 변해 고요한 물가에 세차게 던져진 돌처럼, 평온한 마음에 기다란 물수제비를 불러와 사정없이 잔 파도를 만들며 오래도록 슬픈 잔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외부의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때때로 부러울 때가 있다.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서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해가 안 되고 공감이 안 되는 편이 개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의 눈을 가져버린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그들도 나도 안쓰럽고 가엽다는 생각을 한다. 회의적인 눈빛, 화가 가득 찬 눈빛, 초점 없이 공허한 눈빛, 그 무엇도 신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스스로 다지고 있는 눈빛.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씨앗이다. 예술과 배려, 이해와 공감과 같은 평화의 바탕이 되는 인류의 유산들은 불행을 불쏘시개 삼아 피어나는, 말하자면 고통이 잉태하는 위대한 과실과도 같지만, 자칫 잘못된 트리거를 만나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린 회의주의자만큼 보기 힘든 것은 없다.

행운보다는 불행의 확장성이 언제나 강력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탁한 눈빛을 가진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부디 그들의 눈빛이 다시 맑아져 자신이 겪은 슬픔이 자신과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로 치환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