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서든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쓴다. 실연의 고통에, 망해버린 부모님의 사업에,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에, 치명적인 경제적 손실에, 기대에 못 미치는 자녀의 성취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서둘러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반대되는 감정을 부여해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는 일이다. 즐거운 영화를 본다던지,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본다던지 기쁘고 즐거움을 줄 것 같은 일들을 찾아 그것에 의존한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고통에서 헤어나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옥죄어오는 감정의 수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현재 우리의 마음이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물감과 같아서 같은 색과 맞닿아 있을 때에 어색하지 않게 그 감정에 녹아들 수 있다. 기쁜 상태일 때 기쁨을 흠뻑 느낄 수 있고, 슬픈 상태일 때 슬픔에 풍덩 빠지게 된다.
기쁨이 우리의 슬픔을 희석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회피성 해결책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술에 의존해 단발성 기쁨과 망각에 취하려 하거나 여행이나 명상, 종교와 같은 회피성 해결 방법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기도 한다. 가끔은 이런 방법들로 평화에 도달하는 행운을 거머쥐기도 하지만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해야 한다. 슬픔은 슬픔으로만 위로받을 수 있다. 어줍잖은 즐거움과 어설픈 회피로는 무한할 것만 같은 슬픔의 멍울을 옅어지게 만들 수 없다.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 그 슬픔을 극대화시킬만한 트리거들과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는 이유는 공감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감은 너와 내가 비슷한 처지라는 것, 세상 사람들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 내가 겪는 것이 나만이 겪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깨닫게 만들어 한없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주관의 세계에서 객관의 세계로 나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슬플 땐 슬픈 음악을 들어야 하고 슬픈 영화를 보아야 하며 슬픈 이야기에 자꾸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슬픔에, 비슷한 무늬의 고통에 노출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래 이제 됐다... 이만하면 슬퍼할 만큼 슬퍼했어"라는 마음과 함께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너무 버티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괜찮은 척하려 할 필요도 없다. 겨울철 굉음을 내며 불어오는 산바람과 같은 요동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지기도 하는 것이 자연인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 속에 있더라도 언젠가 담담하게 그 슬픔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인생을 통해 여러 번 마주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