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아침. 며칠간 찌뿌둥했던 몸이 나아질 낌새를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조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씻지도 않고 대충 트레이닝복을 몸에 걸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오고 나서야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정도 비라면 맞아도 되겠다는 생각과, 오늘은 기필코 산책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 왠지 몸이 산뜻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바람막이에 달려있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침산책에 나섰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고요함과 번잡함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십여 년 전 재개발된 동네인지라 앞쪽으로는 꽤나 많은 차량이 쉴 새 없이 거쳐가는 길이 뚫려있고, 지어진 지 10년 내외의 준신축 아파트들, 그리고 꽤 넓은 부지의 빌라 구역이 형성되어 밤낮으로 번화한 상권이 나름대로 도심의 느낌을 자아낸다. 한편 재개발 당시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뒤쪽으로는 오래된 주택들이 구불구불한 골목길 사이에 오밀조밀 남아있어 구도심 주택단지의 정취가 남아있다.
어느 길을 산책로로 결정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로변으로 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올까, 그게 아니라면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와 조용히 빗소리를 들으며 동네 구경을 해볼까. 길게 고민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사실 이 골목길은 내가 앞에서 쓴 글 "열 번의 이사, 첫 번째 나의 집"에서 소개한 아파트를 떠나 첫 번째로 이사했던 집이 위치한 골목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 말처럼 지척에 예전의 흔적이 묻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집을 마주하지 않은 까닭은 깊숙한 골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오래된 기억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의식적으로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떠올리기 어려워진 시간의 거리만큼, 집은 물리적으로도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오랫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었다. 한데 마침 오랜만에 산책을 하려는 찰나 예전의 아득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째서였을까, 무언가에 끌리듯이 골목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약 15년 전에 살았던 곳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기억나는 몇몇 장면이 있었기에 그 시절의 기억이 정확하고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며 걷고 뛰었다. 비 냄새와 쇠 냄새가 섞여 쇳물 냄새라고 해야 할까? 무어라 명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쇠와 물이 묘하게 섞인 그런 냄새가 살며시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골목을 거슬러 걷다 보니 조금씩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래 이런 집이 있었지, 이 갈림길에선 이쪽으로 갔었지, 대로변까지 나가는데 이렇게 오래 걸었었던가. 여러 생각을 하며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른 아침이어서였을까? 골목을 걷는 내내 꽤나 많은 상가가 있었는데 단 한 곳도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폐업을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질 만큼 낡고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었기에 문을 닫았다는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앗간, 정육점, 세탁소, oo상회, 수퍼마켓 등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상가들만 남아있었다. 그 흔한 편의점이나 카페가 하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흐드러진 전선줄 사이로 저 멀리 교회의 십자가가 보였다. 마치 십자가가 전선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것처럼 보인 이유는 내 안의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래되어 부분적으로 페인트가 벗겨진 초록색, 파란색, 은색 대문들은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한다. 사춘기 소년의 이마에 피어난 여드름처럼 주택 외벽의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는 돌 부스러기들 역시도 그렇다. 갈라진 벽, 비바람을 막기 위해 얼기설기 엮어서 포개 놓은 불안한 슬레이트 조각들, 주택 사이로 무성하게 자라난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동네의 나이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한 갈림길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우산과 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시절의 나에게 수도 없이 물었던 그 질문을 소년에게 던지고 싶어진 이유는 소년과 과거의 내가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복 차림으로 비를 맞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내 거리를 두기 위해 먼저 뛰어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나 하고 있었을까. 투툭 투둑. 무언가 묵직한 소리나 나서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감나무가 있었다. 아직 설익은 초록색 감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 알차게 여물지 못한 연약한 꼭지 탓이었을까. 바닥으로 떨어지며 투박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가을이 오기 전 이맘때 즈음에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감이 많이 떨어졌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니 이전에 살던 집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십오 년 전, 내 기억 속의 집보다 한층 더 낡은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집을 마주하게 되었다. 잠시 그렇게 그 집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쳤다. 산책도 마무리해야겠지, 집으로 되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