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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r 26. 2021

그것은 너의 당연함이야

각자의 당연함을 보편적 당연함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사람은 살아가며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필터를 만든다. 그 필터는 연륜이 되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을 갖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방패가 되어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 일은 양면성을 갖고 있듯이 필터링이 늘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경험에서 파생되어 나온 감각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때때로 편견이나 좁은 식견을 드러내는 덫이 되어 나를 덮칠 때도 있다.


아니 그런 당연한 것을 몰라?
그건 상식이야 상식! 넌 상식도 없어?


다수가 동의하는 상식과 당연함의 범주에 소속되는 것은 중요하다. 소수를 선택한 사람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며 다수로부터 "네가 틀렸다"라는 시선을 끊임없이 감수해내야 하기 때문에 늘 귀찮고 피곤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수에 속한다는 것은 언제나 편안함을 제공받는 일이다. 외제차를 구매할 때 비슷한 가격이면 타 브랜드보다 벤츠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을 한 고객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브랜드의 차량을 구입하면 지인들에게 디자인이 어떻고 성능은 어떻고 서비스센터가 어떻다는 둥 설명을 해야 하지만 벤츠를 선택하면 그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는 답이 꽤 많았다. 이를 국산차로 치환하면 현대와 그 외의 브랜드라는 동일한 모양새로 정확하게 대체된다.  


실제 효용성 여부를 떠나 일단 다수의 선택에 의해 상위의 자리를 선점한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부수적인 설명이 필요 없다는 측면에서, 1등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틀렸다는 가정이 아닌 옳다는 가정하에 시작한다는 큰 장점을 갖는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는
세월이 보증하는 합리성과 보편성이 부여된다.


오랜 세월 인정받아온 상식과 당연함은 진리에 가까운 권위를 획득하며 세상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편적 당연함이 없다면 세상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당연함을 보편적 당연함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위계질서가 명확하거나 장유유서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면 아래의 포지션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요즘은 젊은 꼰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처럼 자신의 당연함을 강조하는 것이 비단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다거나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식의 말들이 당연함을 가장하여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말을 아끼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다. 위의 문장은 인내심이 부족한 젊은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거나 한 우물을 파서 성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만한 말이었을 테지만, 인내심이 뛰어난 젊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거나 다방면에 도전해 결국 성공을 거머쥔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무용에 가까운 쓸모없는 말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은 쌀쌀맞다는 생각,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생각, 남자라면 여자라면 으레 어때야만 한다는 생각, 첫째라서 막내라서 외동이라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당연함을 가장한 편견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언제 어디서나 나와 다른 생각을 마주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일 수 다. 부자와 빈자가, 고용주와 고용인이, 남자와 여자가, 도전자와 챔피언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대처 방식과 결과물에 따라 가치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진다. 고통에 짓눌려 결국 포기를 선택하게 된 사람은 고통이란 극복이 불가능한 저주라고 정의 내릴 것이고, 고통을 극복해 낸 사람은 고통이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발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똑같이 불우한 가정사를 겪었더라도 누군가는 평생 가족을 원망하며 점점 사나운 원귀로 변해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비와 은혜의 성자로 거듭난다.


세상엔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숫자만큼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이 있다. 나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적어 내려온 이야기 역시도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테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또 그런 식으로 산다면 기준이 없어져 어떤 일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도 맞다. 세상 모든 말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반박이 가능하다.  


나와 다른 당연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타인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럴 때면 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그 생각을 수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런저런 방법이 잘 먹히지 않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는 권위를 이용해 찍어 누르고 싶어 지기까지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내 안에 꿈틀대는 자기 확신의 욕망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의 평온을 위해 너의 당연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평온을 위해 나의 당연함을 너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의 당연함이  편견이 아닌 연륜으로 익어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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