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말들을 허공에 흩뿌리고 그에 못지않을 만큼 많은 약속을 하곤 한다.말없이, 다시 말해 어떤 소통 없이 타인과 어우러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눈과 입과 표정을 살피며 생존에 필요한 언어를 배워나간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단어를 내뱉으며 삶을 이어가기 위한 도구로 말이라는 것을 사용하면서도, 말의무게를 실감하는 일은 배꼽을 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아주 드물게 다가온다.
병마와 싸우는 한 친구가 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때로부터 어느덧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친구를,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보지 못했다. 안타까웠던 마음은 점차 흐릿해졌고 슬픈 일이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늘 밀렸다. 그렇게 점차 나의 인생에서 희미해져 가는 그에게 어느 날 불현듯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인지 차마 전화를 걸 엄두가 나지 않아 카톡을 보냈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이토록 쉽게 안부를 물을 수 있었으면서 왜 그리 오랜 시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괜찮냐는 의미 없는 나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해주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손가락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정을 못 박아 언제쯤 찾아보겠다는 확신을 나 스스로도 갖기 어려웠던 탓에, 곧 찾아보겠다는 느슨한 약속조차 건네기 민망하여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다는 흐리멍텅한 약속만을 남긴 채 짧은 대화는 소멸하기 직전의 상태에 직면해가고 있었다.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워
짧은 대화의 끝에 그 친구로부터 도착한 마지막 문장은 내 가슴을 무겁게 때렸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이었을까. 그의 마지막 말에 도무지 어떠한 말도 덧붙일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진심이었으리라.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말에는 묵직한 무게가 있다. 그것을 모르고 지나쳤다면 차라리 괜찮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진심이 담긴 말의 무게를 알아챘을 때의 충격은 큰 파장을 불러온다.
말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는 경험은 불현듯 찾아온다. 마흔이 다되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배경을 포기하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을 내린 사람이 조용히 내뱉는 "이제야 나로 살고 있는 것 같아"와 같은 한마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삶의 경험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누군가가 툭 내뱉은 한마디의 말을 곁에 세워두고 가볍사리 스쳐 지나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 사람은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꽁꽁 싸매어두고 살아왔던 것일까, 오롯이 나로서 살아간다는 기쁨은 얼만큼의 충만함을 안겨주는 일일까. 세상 사람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일이다. 같은 말을 마주하며 전에는 맡을 수 없던 향과 풍미를 더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언제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자는 말이 인사치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흔하디 흔한 말 한마디를 앞에 두고도 마주하는 생각이 점차 변한다는 것은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있긴 하지만 신기하고 즐거운 편에 속하는 일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 아직 학생티를 벗어내지 못한 어리고 젊은 대학시절에는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누군가 나에게 건네며 스쳐 지나는 날이면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그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모두가 진실만을 말한다고 믿었으며 그 생각과 믿음을 실천으로 당장 옮길만한 용기와 시간이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직장을 잡고 가정을 꾸리며, 자신만을 돌보던 삶에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한 겹 두른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선택하게 되자 언제 같이 밥 한 끼 하자는 말은 분주함 속에 피어나는 미안함을 감추기 위한 최적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밥 한 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듯, 우리는 때로는 면피하기 위해 때로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렇게 한 마디의 말을 서둘러 툭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재미있는 일은 요즘 들어 밥 한 끼 하자는 말이 또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즘은 뭐랄까... 진심이 느껴진다고 할까. 주변 인간관계의 밀도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하다 보니 이제 누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누가 겉치레로 하는 말인지 조금은 느껴지는 것도 같다. 진심을 담아 밥 한 끼 하자는 말을 건네는 사람의 말에는 그리움과 따듯함이 묻어있다.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어찌 깊은 향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말에는 향이 있다.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스스로 조금은 뿌듯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