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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문장

문장은 머리에, 사람은 가슴에

by 정 호

서른 해를 살짝 넘긴 세월 동안 꽤 많은 사람들과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아왔건만 어떤 사람을 떠올려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남긴 말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말을 추려내기란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물며 내 인생에 얼마나 기억에 남는 말을 많이 해주었는가를 관계의 깊이를 재는 척도로 삼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려봤을 때 기억에 남는 대화 한 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내가 관계 속에서 보내온 시간의 덧없음을 확연하게 느끼게 해 줄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던 말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말들이 생각나는 순간에는 그 내용의 적절성과 적합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저 그 사람이 온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든다.


가끔씩 어떤 이가 예전에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 문장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며 왜 하필 이 문장이 떠올랐을까 생각해보았다.


너를 믿는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자주 저 말을 해주었다. 내가 믿음직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 이유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항상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 순간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나를 믿는다는 말을 건네곤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모로서 자식을 이끌어주고 안내해주어야 하는 순간에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면피성 발언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어릴 적에는 저 말이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 채 다가왔었다. 일탈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신뢰의 적금이라고 할까? 결과적으로 저 말을 자주 듣고 자란 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쪽으로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시끄러운 집안이 싫어 매일 밖으로만 나돌던 중학생 사춘기 시절에도, 일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진로를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어머니는 그저 너를 믿으니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 이외에 어떠한 간섭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본인이 그리고 있는 며느리상에 대해서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릴 적에는 방임이라며, 돌봐주고 챙겨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원망이 섞인 날카로운 말들로 어머니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적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그러한 태도가 나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무엇이 맞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빠와 대화하다 보면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아.


나는 동생과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이다. 어색하고 서먹한 부모님과의 관계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속 시끄러운 가정사를 가진 여느 형제자매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다독이며 어린 시절을 버텨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우애 비슷한 감정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고 둘 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관심사가 비슷했고 사고의 과정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을 지지해주고 지지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물어보고, 도움받을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동생이 어느 날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 나는 오빠랑 대화를 하다 보면 생각이 너무 똑같아서 깜짝깜짝 놀라,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자라온 가정환경이 같은 형제지간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생각이 비슷하고 유사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의지하며 같은 역경을 헤쳐가며 살아온 사람 간의 동질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 준 저 한마디의 말을 동생에게 들었을 때,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 같아서 든든한 마음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너의 우울함이 좋다.


자꾸 가정사를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스스로도 약간 우울감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의 우울한 아우라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1:1로 나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내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그놈을 기어코 캐치해 내곤 한다. 먹을 듬뿍 머금었던 붓을 아무리 맑은 물에 여러 번 빨더라도 처음의 새 붓처럼 완벽히 깨끗해지긴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유로든 한 번 깊은 우울함을 경험했던 사람은 환경이 변하고 세월이 흐르더라도 붓속에 남아있는 먹처럼 은근한 우울감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아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내면에 자리 잡은 우울함 때문에 지속되던 인간 관계에 금이 갔던 적도 있고, 스스로도 벗어나고 싶어 다방면으로 발버둥을 쳐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나의 삶에서 완벽히 그것을 도려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한 선배가 나에게 건넨 말이 나는 잊히질 않는다. "나는 네 우울함이 좋다" 그 역시도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겪으며 비슷한 형상의 내적 외적 자아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찾아내고 그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 역시도 내가 그러했듯 겉으로는 유쾌해 보이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였으며 긍정과 밝음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노홍철이 떠오를 정도로 약간은 과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의 액션과 텐션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 안에 있던 우울함을 들여다보았듯 나에게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우울함이 보였다. 서로가 비슷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어 내 앞에 내놓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귀한 선물이 되었다.


그 앞에서는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 오롯이 나를 나로서 인정받는다는 기분이 들어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도 좋을 것만 같은 해방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너는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


다사다난했던 청소년기 시절, 가정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부에 매진했으나 결국 인 서울을 하지 못하고 고향의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취업이 거의 확실시되는 대학이었던 탓에 입학과 동시에 밥벌이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다는 마음이었을까? 하고 싶은 것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대학 댄스 동아리에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도 몸치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동아리 내에서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가며 연습했고 즐겁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도 많았고 만나는 사람들도 갑작스레 늘어나게 되었다.


취해버렸다. 춤이라는 하나의 예쁜 포장지 덕분에 잠시 스쳐갈 인기가 나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받기라도 한 것으로 착각하여 그때의 나는 자의식 과잉,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연애에 있어서 특히 도드라져 나타났는데 여러 가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당시에 교재를 하던 한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너는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감정을 주고받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받는 데에만 익숙해 있었던 것이었다.


나를 이해해주기를, 나를 배려해주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 깨닫게 되었다. 깨달음을 주고 간 그 친구가 고마웠고 원하는 마음을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처럼 저 한마디의 문장을 마주했던 그 순간은 내가 나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준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한 잔 해야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인사치레로 으레 건네는 말이지만 특정한 사람이 일관된 뉘앙스를 담아 반복하는 말은 예상보다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묘한 마력이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난 한 선배는 첫 만남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만났다 하면 항상 묘한 웃음을 띄며 한 잔 하자는 말로 나에게 인사를 한다. "재석! 한 잔 해야지." "민석! 한 잔 해야지." 이런 식이다.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 표정과 제스처가 뒤섞인 저 말은 무수한 반복을 통해 내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그 선배를 떠올릴 때면 환청이 들리는 것처럼 소리까지도 함께 떠오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대학 시절이 떠오르면서 유쾌한 기분이 은근히 찾아와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지곤 한다.


만나면 한 잔 하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는 사람은 많다. 한데 왜 이 선배가 특히 기억에 남는가 했더니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시절, 그 해 학년 말 즈음에 동아리 공연이 끝난 후 동아리 회원 전체가 모이는 회식 자리가 있었다. 한데 하필 그 날 당일에 갑작스럽게 소개팅이 하나 들어왔다. 사진을 봤더니 꽤 예뻤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마음이 급해져 저녁 모임에 늦을 각오를 하고 소개팅 자리에 나섰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임한 소개팅 자리였지만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길어져 동아리 모임에는 세 시간 정도 늦게 참석을 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고작 한 두 살 많은 선배들이 왜 그렇게도 무서웠던지 모임에 늦게 참석했다는 이유로 어김없이 "한 잔 해야지"를 말하며 글라스째로 소주를 가득 채워 권하는 술잔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글라스에 채워진 소주 두 잔을 내리 원샷을 한 뒤로 그날 모임의 기억은 없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땐 병원 응급실이었다. 술에 취해 술집 어딘가에서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며 눈썹 부근을 부딪혀 찢어진 채로 피를 흘리던 나를 동아리원 몇몇이 둘러업고 병원으로 옮겨온 것이다. 요즘 같으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신고라도 한다면 얼마든지 뉴스에 실릴 수도 있을만한 일이지만 나는 그날의 일을 그렇게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 선배는 나를 만날 때마다 변함없이 "한 잔 해야지"라며 인사를 하고 있으나 약간의 겸연쩍은 웃음이 섞인 인사로 바뀌었고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을 못 볼 때도 있으나 언제건 만나게 되는 날이면 예전 이야기를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그럼 대체 어떡하자고


인생에 대부분의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는 수많은 갈등 상황에서 최선의 답을 찾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은 최선의 합의점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로 이루어진 결과물일 때가 많다.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다 보면 으레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등장하는 대화 주제가 있다. "우리 모임 회비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회비를 걷을 것인가 말 것인가, 걷는다면 얼마를 걷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한 동안 모임마다 열띈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주로 걷지 말자는 포지션으로 모임마다 의견을 피력했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돈일 수 있다.


둘째. 회원 일부가 참석하지 못했을 때 회비를 사용하는 경우에 벌어지는 "아까우면 참석하던가"의 논리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셋째. 두 번째 상황이 특정인에게 자주 발생할 때 멤버 이탈이 우려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 결과 어떤 모임에서는 회비 없이 모임을 꾸려가게 되었지만 어떤 모임에서는 매달 특정 금액을 모아가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모임이 더 성공적으로 굴러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회비 여부와는 관련성이 없다고 답할 것 같다.


회비를 걷어서 그 계기로 자주 보게 되어 더 돈독해진 모임이 있는가 하면 회비는 모으지만 도통 모이질 않아 연말에 환급해주는 모임도 있고, 회비를 걷지 않아도 서로 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자주 모이려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회비를 모으지 않으니 자연스레 소멸되어버린 모임도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회비를 걷지 말자는 나의 생각이 옳았던 것도, 회비를 걷자는 생각이 옳았던 것도 아니라 순전히 구성원이 어떠한가로 귀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한참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 즈음에 한 친구가 답도 없는 문제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듯한 의견 교환이 힘들었던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그럼 대체 어떡하자고!"라고 외치던 장면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둘 다 약간의 취기가 올라 감정적인 상태이긴 하였으나 한 번도 그 친구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다소 놀랍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소리를 쳤던 그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지옥은 선행으로 포장되어있다는 말이 있다. 악으로 존재하는 악도 분명히 있지만 서로의 이상과 선의가 부딪혀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그것은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지옥을 선사하는 셈이다.


선배는 여전히 멋지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어.


임용고시에 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합격과 불합격 한 글자를 사이에 두고 그 선을 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살아간다.

나 역시도 그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며 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경계를 넘지 못해 좌절에 빠져있던 시간이 있었다. 수능도 재수, 임용도 재수 너는 뭐든 두 번씩 할 팔자인가 보다며 위로 아닌 위로도 많이 받았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좌절에 늪에서 허우적대느라 다가올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그때에 내 마음에 가장 큰 위로와 지지가 되는 한마디 말을 어느 후배가 던졌다. 여전히 멋지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그 한 마디의 말은 시험에 떨어지고 근 두 달여간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따듯하고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 말 덕분에 다시 기운을 낼 수 있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살면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생을 통틀어 기억에 남을만한 말들을 서로 주고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말들은 때로는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잊을 수 없는 상처의 말이 내 가슴속 깊숙한 곳에 박혀서 간헐적으로 나를 괴롭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 따듯하고 고마웠던 한 마디의 말들을 더 많이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다독거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하고 아마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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