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숨결이 바람 될 때

by 정 호
죽음은
생의 곁을 지키는 모든 것들을
부차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죽음 앞에서 생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무수한 조각들은 얼마나 가볍고 하찮은 것들로 전락해버리고 마는가. 그간 살아오며 애써 움켜쥐려 했던 모든 것들의 의미와 쓸모를 블랙홀처럼 흡수해버리는 죽음이라는 회피 불가능한 운명을 맞닥드렸음에도, 끝끝내 남은 생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실현해내며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한 남자가 있었다.


암 판정을 받기 전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성공가도를 밟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승리를 일궈오며 살아왔다는 말로 그의 삶을 정의 내리기엔 그가 삶에 대해 품어온 진지한 태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처음부터 의사를 꿈꾸며 세속적인 성공을 탐하지 않았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고 삶과 죽음을 깊게 들여다보며 생의 의미를 찾아가고 싶었던, 정확히 말하자면 세속과 육체의 세계보다는 정신과 영혼의 세계에 속하고자 했던 청년이었다. 추천사를 써준 아브라함 버기즈 교수의 말에 의하면 주인공 폴은 문학교수가 되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회고한다.


인생은 결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마주침들로 무수한 변화를 만들어내며 이어져 나간다는 철학자 들뢰즈의 말처럼 작가의 삶도 몇 번의 결정적인 마주침들이 그의 인생의 궤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한 친구가 "너는 항상 고상한 헛소리만 읽는다"며 던져준 소설 한 권을 읽고 문학도를 꿈꾸던 주인공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이 사건으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무신론자이자 예비 철학도였던 주인공은, 뇌과학과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입학 예정이었던 스탠퍼드 대학 강의 안내 책자에서 생물학과 신경과학 강의를 찾게 만들었다. 그 순간이 바로 훗날 자신의 삶을 문학도의 삶에서 의학도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 초석이 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당시의 그는 과연 알았을까.


한창 방황을 하던 중학교 3학년이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로 기억되는 그때, 당시 학교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이 난 교사가 담임으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괜한 두려움이 앞섰다. 20년 전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교사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전자는 폭력과 권위로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교사, 후자는 규칙에 엄격한 교사.


담임은 경계를 구분 짓기에 모호한 면이 있었지만 후자에 조금 더 가까웠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었다. 연합고사가 존재했던 당시에 담임교사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 여부가 애매한, 그러니까 소위 성적이 간당간당한 학생들을 특별 관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본인의 어떤 실적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인지, 순수하게 교육적인 목적으로 학생들의 앞날을 위해서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정성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나는 그 특별관리 학생에 포함되었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 정도가 담임교사의 관리를 매일 받았다. 새벽 한 시에 반드시 집 전화로 담임교사의 폰에 전화를 걸어 신호를 세 번 울린 뒤 끊을 것, 다음날 아침이면 전화번호가 찍혀있지 않은 특별관리대상 학생은 엎드려뻗친 상태로 엉덩이를 맞았다.


체벌의 교육적 효과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체벌이 교육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동기부여를 할 수 없는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교육이론과 교육서적을 통해 여러 차례 배웠고 충분히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그때는 그런 것이 용납되는 시대였을 뿐이다.


당시에 그 담임 선생님은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긍정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당시에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체벌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을 뿐이고, 나는 운이 좋게도 그것을 받아들여 만족할만한 성과를 냈기 때문에 돌이켜봤을 때 당시의 담임교사의 전략을 내 인생에 중요한 마주침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마주침은 우연히 일어나고 그 우연한 마주침이 내 삶 안에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주인공 폴은 대학에 입학해 문학과 철학, 생물학과 과학의 역사 등을 공부하며 영문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석사 학위를 마치면서 도덕적 명상은 도덕적 행동에 비해 보잘것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관념의 철학을 공부하다가 실천적, 생물학적 철학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학문은 삶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면하는 의학이라는 생각에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렇게 문학과 철학, 의학을 공부하며 자신이 세상에 대해 품었던 철학적 고뇌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던 그의 삶은 곁에서 보기에 이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레지던트 과정의 막바지에 다다르며 완벽에 가까운 그 정점의 순간에 도달하기 직전에 주인공은 암 판정을 받는다.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사건들이 종종 우리의 삶에서 벌어진다. 작가의 삶이 그러했다. 가장 찬란한 순간의 절정에서 세상살이의 모든 의미를 앗아가는 선고를 받는 처참한 기분을 어찌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죽음을 선고받고 그는 어떤 생각으로 에세이를 기록했을까.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삶과 죽음의 의미나 이유, 그간 자신이 공들여 다져온 세상일에 대한 자신만의 고찰에 대해 충분히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며 자신의 삶을 기록해 나갔다.


어찌 보면 그저 일상의 묘사에 불과할 수 있는 작가의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의 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찬란하게 그의 삶을 비춘다.


병마를 인정하고 의사로서의 삶에서 환자로서의 삶으로 대전환을 맞이한 주인공은 서서히 정체성을 잃어간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의해서 정의 내려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어떤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쇠약해진 육체와 환자로서의 삶은 서서히 자신을 신경외과 의사나 과학자,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느낄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환경과 조건들에 의해 스스로를 정의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내면의 힘에 대해 어떤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는 스스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주어진 것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정쩡한 반기를 들게 만들기에 충분히 비관적인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자신에게 남은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살아내야 할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것에 대한 답은 바로 아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었고, 부부 모두에게 해당되는 남은 삶을 계속 살아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자 희망이었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중 하나는, 인간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는 인간만이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앞날이 칠흑처럼 어두운 어둠 속에서 한줄기 희미한 빛조차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인간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도살당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런 희망도, 아무런 기대도 품지 못하는 미래를 마주하며 과연 인간은 어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서 삶의 활력과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처연한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초반에는 결코 예후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던 담당의가 10년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예후를 입에 담았을 때 주인공의 마음에는 얼마나 환하고 강력한 새로운 희망의 동력이 생겨났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해왔다.


스물한 살에 교통사고를 경험했다. 죽음의 문턱을 살짝 넘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고 죽음이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며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조금은 초연함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지금껏 믿었다.

죽음을 알지 못한 채로 죽음의 경계에 살짝 발을 담갔다가 생의 세계로 돌아온 것과 의식을 가진 채 죽음에 한발 한발 끌려가는 것을 매일 자각하는 일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나는 잠시 죽음의 경계에 다가섰던 것만으로 죽음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실제로 거의 확실한 죽음을 판정받은 채 하루하루 삶 속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의사 부부가 적어 내려 간 삶의 기록. 의료인이었기에 보다 상세히 기록해 둘 수 있었던 치료의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기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죽음과 마주하는 의사라는 직업으로 환자의 삶을 들여다보던 주인공은 순식간에 자신이 환자가 되어 평생을 고민해왔던 삶과 죽음에 대한 완벽한 종합적 체험을 경험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도 잔인한 일일 테지만, 그가 죽음을 앞두고 그에게 가장 소중했을 시간을 할애하여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며 그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은 짧지만 어쩌면 이 책을 쓴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의 말을 딸에게 남긴다. 네가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는 날이 온다면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었노라고, 그것은 위대한 일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 달라고.


누군가는 평생 죽음을 두려워만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죽음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나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어떤 의미를 찾으며 살아갈 것인가. 답을 찾은 사람의 눈이 어찌 빛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숨결이 어찌 고르지 않을 수 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