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하얀 집

언젠가 소설이 될 한 장면

by 정 호

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대학 4학년, 졸업을 두어 달 앞둔 두 친구 A와 B는 A의 자취방에서 A의 취업을 축하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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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야 축하한다~ 그렇게 이를 갈고 미친놈처럼 살더니 결국 네가 해냈구나.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우리 동기들 중에 졸업 전에 취직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내 친구 중에서! 야 나는 네가 정말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A: 자랑스럽기는 친구끼리 뭘... 야 술이나 한 잔 하자. 우리 이렇게 자취방에서 둘이 술 한잔 하는 것도 겁나게 오랜만이네. 얼마만이냐 이게


B: 음... 올해는 처음인 것 같네. 네가 취업 준비한답시고 안 만나 주니까 그렇잖냐. 이제 취업도 했고 친구들 좀 챙겨 인마.


서운함이 서운함을 덮을 때가 있다. 나의 서운함과 너의 서운함. 어떤 것이 더 커다란 블랙홀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 한쪽의 서운함이 다른 한쪽의 서운함을 이해하고 덮어줄 때 충격파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자신의 서운함만을 커다랗게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A: 그래. 내가 그동안 좀 많이 튕겼지? 내가 사죄의 의미로 오늘 쏜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라~


B: 레알? 아라쓰 그럼 오늘 소고기 한 번 먹는 거야?


A: 소고기 가지고 되겄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 오늘은 형이 쏜다!


B: 아따~ 역시 사람은 잘되고 볼일이네~ 고맙다 친구야 오늘 니 덕에 맛난 걸로 배 터지게 한번 먹어보자.


A: 그래. 이제 며칠 뒤면 이 집에서도 나가야 되니까. 어쩌면 오늘이 이 집에서 먹는 마지막 술이 될지도 모르겠네.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왠지 찡하네. 그래도 그 마지막이 너랑 함께여서 기억에 남을 것 같기는 하다. 우리 4년 전 신입생 때, 방 구하러 다녔던 거 기억나냐? 진짜 거짓말 안 보태고 이 동네 원룸이란 원룸은 다 보고 다녔던 것 같은데 말이야.


B: 기억나지... 야 너는 근데 진짜 한 집에서 어떻게 4년을 내리 살 수가 있냐. 질리지도 않냐. 하여튼 이 새끼는 여러 의미로 독한 새끼라니까.


우리는 거의 매일 우리의 약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실제 자신과 다른 만들어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무시나 괄시처럼 폭력적인 방법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태연과 평온함을 가장하는 것과 같이 형태를 바꿔가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결국은 가짜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들켜버리고 만다.


A: 귀찮게 뭐하러 자주 이사 다녀. 그리고 그때 너무 많은 집을 봐서 딱히 이사 가고 싶은 집도 없더라 야.


B: 많이 보긴 했지. 그때 언덕 위에 하얀 집 기억나냐? 레알 무서웠잖냐. 아니 집주인은 뭔 생각으로 원룸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 전직이 뭔지 의심스럽다니까. 정신병원 병원장 이래냐? 이름만 들어도 살고 싶지 않은 집이다 진짜로.


A: 기억나지. 실제로 언덕 꼭대기에 있었잖아. 아니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서 본인은 창의적이라고 생각했을까? 너무 다이렉트 한 거 아니냐. 집에 들어갈 때마다 병원 들어가는 느낌이 날 것 아니냐고~ 집주인 눈빛도 퀭한 것이 절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의 집이었어.


B: 벽도 하~얘 가지고 진짜 아니 집주인 너무 순수하신 것 아니냐고. 거의 뭐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자식 이름 지을 때 아들 아니라서 분하다고 분한이, 길에서 낳았다고 길자, 막내딸이라고 막분이 뭐 이런 느낌으로 원룸 이름도 지은 거 아니냐.


A: 맞다 맞아~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집이었으니까, 있는 그대로 떠오르는 이름이긴 하지 뭐.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기도 하고.


B: 낭만은 얼어 죽을 낭만이냐. 취향 독특한 새끼네.


A: 야야. 그 집 바로 옆에 있던 뷰 좋았던 집 기억나냐. 언덕 위에 하얀 집은 앞이 나무로 가려서 뷰가 없었잖아. 근데 그 옆집은 앞이 뻥 뚫려서 뷰가 진~짜 좋았는데. 그렇지?


B: 맞다. 기억난다. 그래서 우리 둘 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파노라마 뷰가 이것이구나 했잖아. 와 진짜 뷰가 끝내줬었지. 살면서 본 집들 중에 창도 제일 크고 하늘이 제일 많이 보였던 집이었어.


A: 너는 뭔 두더지 새끼냐? 땅속에서만 살았어?


B: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좋았다고


A: 그래 ㅋㅋㅋ 하여튼 뷰는 진짜 좋았지. 거기 살았으면 경치 핑계로 술을 두 배는 더 마셨을 거야. 그치? 그럼 취업도 못했을... 아니다. 한 잔 하자.


B: 하... 좋은 날이니까 내가 참는다. 근데 그 집 갔으면 술이 문제가 아니라 오르막 길도 문제였을 거야. 그 높은 데를 어떻게 맨날 올라다니냐. 수업에 죄다 지각했을걸? 올라가기 싫어서 친구들 집에서 맨날 잤을지도 몰라.


A: 그럼 내가 또 친구들한테 월세 주지 뭐. 요즘 전전세? 전월세? 뭐 그런 개념으로다가.


B: 와 이런 투기꾼 같은 새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우리나라 집값이 이렇게...


A: 자자 됐고! 술이나 한잔 하셔.


B: 크흡... 좋은 날인데 나는 왜 이렇게 술이 쓰지? 아오 배 아파서 그런갑다. 너는 달지? 인생이 다냐 이 새끼야.


A: 아니 갑자기 왜 급발진이냐. 너 이 새끼 그렇게 급발진하니까 여자한테 맨날 차이는 거 아니냐.


B: 그게 지금 뭔 상관이야 이 새끼야. 아? 급발진하니까 생각나네. 야 거기 왜 집 현관문 열자마자 버스정류장 있었던 집 기억나냐? 역세권도 그런 역세권이 없다. 초 역세권을 넘어선 초초초초초역세권 아니냐? 아니 근디 역세권인데 왜 그렇게 싼거여. 시장경제 흐름에 안 맞는 매물 아니냐.


A: 그 집이 봤던 집들 중에 제일 저렴하긴 했지. 근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진짜 거긴 도저히 못살겠더라. 아니 자동차 매연이 창틀을 부식시키나? 창문이랑 문고리가 거의 뭐 삼국시대 빗살무니토기 급 유물인 줄 알았다.


B: 아 이런 멍청한 새끼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거든? 삼국시대는 철기시대고? 이런 무식한 새끼가 어떻게 취업을 했지. 대한민국 기업들은 도대체 인재를 알아보지를 못하는구만.


A: 철기시대 우리 집 앞 삼겹살집 이름인데 거기 존맛.


B: 하... 먹고 죽어라 이 새끼야.


A: 원샷!


B: 너는 그럼 그때 봤던 집들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집이 뭐야?


A: 너는 뭔데?


B: 하.. 내가 먼저 물어봤으니까 네가 먼저 대답해주는 게 상도덕 아닐까?


A: 그래 ㅋㅋㅋ 내가 상도덕을 지켜주지. 나는 그때 왜 여자들만 사는 빌라라고 했던 단지 기억나냐? 원룸은 아니고 왜 작은 빌라 몇 동 있었던 단지 있잖아 후문 쪽에. 그래서 남자가 그 빌라 단지 정문으로 들어가면 눈에 확 튀어서 뭔가 금남의 구역? 성스러운 공간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까? 성당이나 절에 들어갈 때 느껴지는 어떤 경건함 비슷한? 우리 처음에 그런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쫓겨났었잖아. 그때 여자들만 사는 빌라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서 꽤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 같아.


B: 맞아 내가 거기 잘 알지. 예전에 거기 사는 여자애를 잠깐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 핑계로 집을 안 데려다줬어.


A: 응? 그게 뭔 상관? 입구까지는 데려다줄 수 있는 거 아니냐?


B: 데려다 줄 거면 확실하게 집 안까지 데려다주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그냥 안 데려다준다. 그게 내 연애 철칙이다.


A: 그게 뭔 철칙이냐.


B: 그런 게 있어. 아가들은 몰라도 돼


A: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어르신께선 기억나는 집이 뭡니까?


B: 나는 지금 사는 집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어. 너도 알지? 우리 집 앞에 은행나무가 큰 게 하나 있거든? 가을이면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노란 은행잎들이 바닥에 촤악 깔려서 눈이 부신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뭔가 내 기분, 내 미래까지 환해지는 것처럼 착각이 들어서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진다? 뒤를 돌아보면 오래돼서 낡아빠진 우리 집과 대조돼서 다시 금방 기분이 나빠지긴 하지만, 뭐 어때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지는 그 느낌이 좋은걸. 요즘은 그런 느낌조차 쉽게 잡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욜로와 힐링을 단지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의 일탈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무섭도록 차갑고 시린 충격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일탈이나 자기만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돌이킬 수 없는 좌절, 손쓸 수 없는 무기력의 종합적 결과물을 어찌 단순히 개인의 역량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A: 답지 않게 진지하네? 사춘기냐?


B: 갱년기다 이 새끼야


A: 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어르신은 다르구만.


B: 하... 술이나 먹자.


A: 우리 참 원룸 많이도 보고 다녔다 그렇지? 학교 앞 원룸들이 빠삭하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순간들도 그리워질까?


B: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A: ...잘 살자.


B: 그래 취업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