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무엇이 나를 여유롭게 만드는가

by 정 호

지방 촌놈이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를 몰고 다녀올까도 고민했지만 자차보다 KTX로 다녀오는 편이 이동시간도 절약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그저 가만히 이동수단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과 운이 좋다면 이동하는 동안 글감이 떠올라 글을 한편 쓰면 좋겠다는 욕심도 부려보았다.


마침 가루눈이 내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사의 호젓한 풍경을 운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한평생 역사를 지킨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철도원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집에 돌아가 다시 한번 영화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차에 오른다.

기차에 올라 잠시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갓 내린 새하얀 눈이 땅 위에 살포시 한 겹 쌓여 지상의 색깔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리기 직전이다. 조금만 더 눈이 내린다면 알록달록한 땅 위 천연의 색들은 하얀색 아래에 가려져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될 테다.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되는 하얀색 물감은 다른 색을 희미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완벽히 덮어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땅 위에 내리는 하얀 눈은 세상 모든 색깔을 뒤덮어 그 아래에 묻어두는 강력함을 발휘한다.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는다. 무엇 때문에 다른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단순히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느냐 가만히 탑승해서 가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이외의 어떤 차이점이 기차와 자가용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첫 번째로 시야의 폭이 다르다는 점이다. 자가용의 A 필러와 B필러가 시야를 가리는 것과 달리 기차의 창문은 통창이다. 부분적으로 가려진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분명 어떤 커다란 차이가 있을 테다. 그것은 통쾌함일 수도 시원함일 수도 개운함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곳을 찾아 헤매는 존재이지 않은가.


두 번째는 시선의 위치와 속도감이 다르다. 자동차 안에서는 수평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같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 도로를 달리며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건물과 지형지물은 주로 수평적이거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국일 때가 많다. 그것은 자동차 도로가 애초에 건물들과 근접한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옆을 보거나 위를 올려다보게 될 때에는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반대로 기찻길은 어떤가,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설치된 기찻길 덕분에 기차 안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진 도심의 모습과 건물의 모습을 내려다보게 된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은 휙휙 스쳐 지나가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대상들은 천천히 흐르며 지나간다. 이렇게 시야의 위치와 지나치는 대상들의 속도감 때문에 기차 안에서 우리의 두 눈은 자동차 안에서 보다 조금 더 여유를 갖게 된다.

세 번째는 이동하는 차량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안에서 창밖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눈이 피로해진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스쳐 지나는 자동차들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시선을 분산시키고 방해하는 자동차들 때문에 우리는 편히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 힘들다. 시골길이나 바닷가, 산길이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방해물이 적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혼자서 조용히 먼길을 떠날 때에는 자동차보다 기차를 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의 불편함이 얼마 정도 찾아올 테지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리 급하지 않다면 기차 여행은 호젓함과 여유로움을 선물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