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를 구입한 이후 한참을 쓰지 않고 안방 베란다 건조대에 걸어두었던 모둠 빨래집게가 부서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양말과 속옷을 모둠 빨래집게로 집어 걸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건조기를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집게를 바라보며 집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집게의 존재 이유를 사라지게 만든 대상인 건조기를 바라보며 빨래집게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간다.
사과껍질을 바라보며 과도를 떠올리고 놀이터를 바라보며 어린아이를 떠올린다. 에어컨을 바라보며 선풍기를 떠올리고 김치 냉장고를 바라보며 장독을 떠올린다.바라보고 있는 대상과 관련된 것을 떠올리거나 대체되어 사라져 버린 것들을 추억한다.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얼굴 정도가 유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옛 드라마 첫사랑에서 손현주가 읊조린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노래 가사는 그런 의미에서 삶의 진실을 관통한다.
건조기에서 빨래집게로 시선을 옮기며 생각해본다. 빨래집게는 왜 그렇게 힘없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을까. 모든 물성을 지닌 존재들은시간의 흐름과 함께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어간다. 다이아몬드가 가치로운 이유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가 진실인지는 물리학자가 아닌 이유로 알 수 없으나 빨래집게가 영원히 변치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빨래집게가 가지고 있던 태초의 물성은 "단단한 탄력성"이었을 것이다. 단단하지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탄력성. 시간의 흐름과 함께 탄력적이라는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단단함만 남게 되자 작은 외부의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바스러져 버린 셈이다.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 테다. 환골탈태라는 말처럼 본래 가지고 있던 성질에서 벗어나 완벽히 새롭게 탈바꿈하여 보다 나은 상태로 진입하는 경우도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어쩌면 환골탈태란 본성을 완벽히 새로운 본성으로 대체하는 과정일런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것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갖춰 입은 옷이 맞춤 슈트처럼 몸에 꼭 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환골탈태라 부르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빨래집게의 경우에는 본성을 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과정인 환골탈태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 하나가 소멸되었고 그것은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변화였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본성을 잃는다는 것은 존재의 소멸을 가져올 만큼 위협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하다.
동물원에 갇혀 야생성이 사라져 버린 사자에게서는 동물의 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 이상 위엄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야생의 환경에서 약육강식의 정점에 위치해있던 포식자로서 사자의 본성이 소멸된 탓이다. 야생성이 사라진 사자는 토끼와 다를 것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때가 되면 먹이가 제공되어 생존을 위한 위기의식이 없어진 사자에게 따사로운 햇빛은 포근함이요, 울타리 밖의 관람객의 소음은 낮잠을 위한 교향곡일 뿐이다.
퇴직을 하면 금세 늙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이것 역시 오랜 세월 직장생활을 하며 몸에 새겨진 어떤 본성이 퇴직과 동시에 소멸되어버렸기에 한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동력의 소멸로 보아야 옳다. 직장인으로서 수십 년간 행해왔던 반복적이지만 그 안에서 나의 존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수많은 상황들이 퇴직과 동시에 더 이상 나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힘차게 굴려왔던 인생열차를 더 이상 어떻게 굴려야 좋을지 모를 황망함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실제로 육체적 생명력의 소실을 불러일으킨다.
남녀는 어떤가. 결혼생활을 어느 정도 이어온 부부관계에 있어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로 "남편이 더 이상 나를 여자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혹은 "아내가 나를 철부지 어린애 취급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역시 본성의 소멸과 관련성이 있다. 부모로, 직장인으로, 사위와 며느리로, 사회의 건실한 구성원으로 나름대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DNA 어느 한구석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본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서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부부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건강하게 지속되기 어렵다. 그것은 앞서 말한 사자와 퇴직자처럼 본성의 일부를 잃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빨래집게는 그렇게 본성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바스러져버렸다. 힘을 세게 준 것도 아닌데 약간의 압력이 가해짐과 동시에 집게의 손잡이는 부러져버렸고 테두리를 잡아 들어 올림과 동시에 테두리는 뒤틀리며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환골탈태가 아닌 이상 본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본성을 거스르려 하는 순간, 그 순간이 소멸을 앞당기는 트리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