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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y 13. 2022

배움에 대한 태도의 차이

겸손과 위계의 관계성

평생학습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80세 만기였던 보장보험의 나이 상한이 100세로 확장된 것만 보아도 기대수명이 높아졌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토록 긴 세월 동안 배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살아갈 세월이 늘어난 것에 비례해 배움에 대한 열정과 그 열정을 해소시켜줄 커리큘럼들 역시 점점 늘어가고 있다.   


평생학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학습을 즐겁게 생각하고 평생을 배우려는 자세로 삶에 임하게 된다. 한데 이 "배움"을 청할 때 앞에 따라붙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자세"다


배움 앞에 우리는 정말
겸손해야만 하는 것일까?


배움과 겸손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전에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만 같다. 배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 앞에 겸손을 붙여도 되는지 붙이면 안 되는지, 아니면 때에 따라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인지 판단이 설 것 같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배움이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의미일 수도, 밥벌이를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직업의 테두리 안에서 승진을 위해 공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좁게 보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익히는 과정을 배움이라고 볼 수 있을 테고 넓게 보면 살아가며 겪는 모든 것을 배움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다.


좁게 보던 넓게 보던 어쨌든 배움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느끼고 알게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새롭다는 것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감정이자 인식이다. 즉 배움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내 안으로 들여오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보면 배움이란 필연적으로 나 이외의 외부의 존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존재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겸손은 미덕이며 아름다운 우리의 관습이다. 다만 과한 것은 늘 부작용을 발생시키듯 겸손 역시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유교 국가인 탓일까. 겸손한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탓에 배움과 가르침의 과정에 겸손을 덧씌우며 배움의 과정을 수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겸손해지기 싫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윗사람이며 배우려는 사람은 아랫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겸손의 미덕에 따르자면 아랫사람은 응당 겸손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배움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배움을 청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처해서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을 배우려는 사람과 조금도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 사이에는 널 수 없는 큰 강이 존재한다. 그 강의 이름은 바로 겸손이라는 계곡에서 파생된 "위계질서"다. 배움의 과정에 위계를 입히고 그것을 겸손이라는 아름다움으로 포장해버리는 순간 배움에 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배움은 결코 위계에 의해 촉진될 수 없는 탓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잘못된 장막을 거둬야 한다.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 결코 위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움을 청하는 일이 결코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때로는 배우는 사람이 되고 때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며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봐야 한다. 가르치다 보면 알게 된다. 가르치며 배운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배우고 배우며 가르친다. 그렇기에 배우는 사람은 과도하게 허리를 굽힐 이유가 없고 가르치는 사람도 오만하게 고개를 들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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