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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05. 2022

선생님 오늘은 뭐해요?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해요?


체육 전담을 하다 보니 3~6학년 아이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질문을 받는다. 복도에서도 급식실에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도 아이들의 이 같은 질문 세례는 멈출 줄 모른다. 처음에는 질문에 일일이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오늘은 투포환 연습을 해볼 거야. 오늘은 배드민턴을 할 거야. 오늘은 배구를 배워볼 거야. 오늘은 골프를 배울 거야. 오늘은 사이드 스탭을 이용한...


물어보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이거야 원, 아이들의 반복되는 질문과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같은 답을 하다 보니 현기증이 올 지경이었다. 녹음기로 녹음을 해두었다가 물어오는 아이들이 다가오면 자동 재생이라도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을 뿐 내 답과 태도는 곧 무성의하고 편안한 쪽으로 쉽게 항로를 틀어버렸다.


"오늘 뭐해요"는 앞으로 금지어야 금지어!
수업 와보면 알아~


교사의 입장에서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 질문을 원천 봉쇄할 수 있고 더 이상 피곤하게 일일이 응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고요한 평화가 찾아오자 잠시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은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그저 아이들인 탓에 궁금함과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모두가 다 호기심이 넘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재빨리 첫 번째 답변을 봉쇄시켜버렸다. 


그렇다면 교사와 친해지고 싶어 그냥 말을 한번 걸어보고자 하는 외향적인 성향의 아이들의 친교적 활동이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평상시 조용하고 아이들끼리 있을 때조차 말수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의 질문 빈도가 만만치 않게 높다.


옳거니, 그렇다면 이제야 답을 알 것도 같다. 무얼 하는지 미리 파악해둬야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스스로를 안정적인 상태로 몰입시킬 수 있는 성향의 아이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앞선 생각 모두는 아마도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 중 어느 아이에겐 정답이겠고 어느 아이에겐 오답일 테다. 그렇게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정답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이유를 하나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던지는 "선생님 오늘 뭐해요"라는 질문에 담긴 속내는 아마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해보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아나공(아나 공이다~라며 축구공을 던져주고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교사는 놀고먹는 체육수업을 이르는 말) 수업은 대의 체육수업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학부모에게는 민원의 원인 제공이자 학생들에게는 교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손쉽게 앗아가게 만드는 최악의 수업방식인 탓이다. 더욱이 그런 수업 방식은 체육교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잃게 만들어 교사 본인을 자괴감에 빠뜨려버리고 만다. 이는 교사로서 자신에게 저주를 거는 것과 다름없는 수업방식이다.


그런 까닭에 같은 내용의 수업을 세 번 이상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다양한 신체적 경험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이들 모두가 한 번이라도 주인공이 되는 짜릿한 느낌을 가져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


어른이건 아이건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고, 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는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며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농구를 잘하는 아이, 배구를 잘하는 아이, 육상을 잘하는 아이, 배드민턴을 잘 치는 아이, 모두 마찬가지다. 교사의 대답에 따라 본인이 오늘 주연이 될지 조연이 될지 단역이 될지 결정 날 판인데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랴.


누구나 살면서 주인공이 되기를 꿈꾼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꼭 주인공이 되어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의,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추억으로, 또 때로는 다시 한번 도약해 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로 모습을 바꿔가며 메말라 찢어지고 갈라지는 삶의 순간들을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보습제가 되어줄 수 있다.  


"내가 왕년에"를 남발하는 모든 행위의 근원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잘 나갔던 시절,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던 것만 같았던 시절이 그립기 때문이다. 허상이 되어버린 "왕년"만 찾으며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다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주인공이었던 "왕년"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된다는 측면에서 왕년이 없었던 사람보다 왕년이 있었던 사람이 삶을 살아가려는 자세에 있어서는 조금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살면서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지만 주인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적다. 혹은 운 좋게 그런 시절을 마주했다고 하더라도 금세 스쳐 지나가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한여름밤의 꿈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채 사라지지만 남겨진 꿈은 또 다른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선생님 오늘 뭐해요?"라는 질문에 무어라 답을 해야 좋을지 조금은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은 어쩌면 이미 주인공이 될 준비가 되어있는 친구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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