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와 들뢰즈의 우발성

그어놓은 선을 하나씩 지워내는 일

by 정 호
선생님 저는 원래 공부를 못해요.
선생님 쟤는 원래 말이 없어요.


이것은 강력한 저지선이다. 이런 저지선이 펼쳐질 때 나도 너도 옴짝달싹 할 수가 없게 된다. 언어는 행동을 구속한다. 나는 원래 그런 놈, 너는 원래 그런 놈이라는 말은 그래서 위험하다. 프레임에 갇혀 진짜 그런 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고 원래 말이 없는 사람도 없다. 무수한 원인들이 연쇄작용을 하여 그러한 결과에 다다르게 된 것뿐이다. 원래 그렇다는 말은 타고난 본질이 그렇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원형이자 이데아이며 애초에 그렇게 될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 그런가?


이데아를 경계하고
우발적 마주침을 긍정하라


플라톤은 이데아를 말했다. 이데아는 플라톤이 그어놓은 저주의 선이다. 현대인들은 여전히 플라톤이 그어놓은 이 거대한 선을 넘지 못한 채 허우적대느라 기쁨을 빠뜨린 채 공허한 근원과 본질 추구에 목을 맨다. 정답을 찾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데아는 절대 선이다. 절대적이며 변화하지 않는 이상적인 설계도. 이상향, 혹은 본질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진화와 발전은 호기심에 빚을 지고 있다. 호기심은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다. 궁금함은 왜냐는 질문을 낳고 왜냐는 질문은 끊임없이 더 나은 답을 갈망한다.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속성이다. 하여 어찌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데아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로 인해 이데아를 추종하는 태도는 때때로 진보와 발전을 촉진하는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한다.


다만 답정너 적인 삶의 태도가 타인으로부터 외면받는 이유 역시 이데아의 추종 때문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거두어들여야 할 삶의 자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답정너란 무엇인가. 내가 이미 설정해둔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연인의 대화를 살펴보자.


A: 오늘 저녁 뭐 먹을까?

B: 아무거나 먹자~ 난 다 좋아 ^^

A: 김치찌개?

B: 더워서 찌개는 별론데

A: 그럼 피자 먹을까?

B: 밀가루는 살쪄서 싫어

A: 그럼 쌀국수?

B: 점심때 친구들이랑 먹었어

A: 그럼 초밥 먹을래?

B: 일본에서 방사능 폐수 방출하기로 했다는데 생선류는...

A:....???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이 쪄서도 안되며 최근 식사와 겹치지 않아야 되고 사회적 이슈와도 거리가 멀어야 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녁식사 메뉴를 본인도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헛손질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데아는 거대담론에서 뿐만 아니라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의 영역 안에서도 우리의 행동을 좌우한다.


서울대와 전문직이라는 이데아는 대한민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작동시키는 거대한 툴이다. 행복과 성공은 다양한 곳에서 발견하여 향유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 경제, 문화적 자본을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경로만을 행복에 이르는 첩경으로 삼아 손쉽게 행복=서울대(전문직)이라는 이데아를 그려낸다.


이데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비단 타인의 외면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이데아를 그려대고 있다. 그렇게 나만의 이데아를 설정해두는 태도는 타인의 외면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갉아먹는 저주이기도 하다.


배우자는 무조건 의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A 씨, A 씨의 배우자에 대한 이데아는 의사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자기 주관이 확실한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버린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B 씨, B 씨의 자녀가 대기업 취업과 공무원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면 B 씨는 고개를 떨구고 말 테다. 그의 자녀는 자신의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섣불리 이데아를 설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양한 가능성을 말살하는 일이자 나를 안팎으로 투쟁 상태로 내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데아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한 저녁식사 메뉴의 사례에서 모든 필터를 거쳐낸 완벽히 B의 마음에 드는 저녁식사 메뉴란 과연 무엇인가. 서울대와 전문직은 정말 행복을 보장하는 만능열쇠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세상이 정해둔 온갖 이데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할 때는 편안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편안함은 자의에 의해서 탐색되기보다 타의에 의해서 강압될 때 더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 자유란 감당하기 버거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며 자발적인 것은 보통 그 자체로 수고롭고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 세상이 정해둔 기준에 우리를 맞출 때가 더 많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고 행함의 결과를 책임진다는 것은 자유로우면서 무서운 일이다. 틀렸다는 손가락질이 무섭고 틀렸을 때 뒤따라올 아직은 인식하지 못한 모래바람이 두렵다.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되지 않나요?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시쳇말로 될놈될이라는 이 표현은, 외부의 어떤 자극이나 변수가 투입되더라도 타고난 재능이나 성향에 의해 어차피 잘될 놈은 잘되고 안될 놈은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자식이 될 놈인지 안될 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알 수 있다고 한들 본인들은 그 토양에 어떠한 비료와 물도 주지 않겠다는 발상. 그것을 나는 지금껏 부모의 게으름 혹은 무관심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데아와 마주침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그에 맞춰 생각하게 되었다. 될놈될이라는 사고방식은 원인론적 세계관이다.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는 형상(이데아)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교육을 업으로 삼는 사람 입장에서 불편한 사고의 패턴이다. 이 사고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교사로서 존재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될놈될인데 교사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부모는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교사와 부모는 무수한 마주침을 제공해주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아 보이는 온갖 것들에 현혹되지 말자.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선을 그어두고 나는 이 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태도를 조심하자. 나만의 생각을 정립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생각 속에 갇혀 마주할 수 있는 귀한 기회들을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또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선 밖으로 한발 내디뎠을 때 예상치 못한 무수한 마주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들뢰즈의 말에 따라 다양한 우발적 경험들과 마주해야 한다. 진정한 긍정은 그곳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정말이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원래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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