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를 지켜주려고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말

by 정 호
아들: 난 지구를 지키는 정의에 용사 경찰 특공대다

아빠: 난 지구를 부시러 온 악당 괴물이다

아들: 이얍 공격 미사일 발사!

아빠: 아들! 그런데 아들은 왜 악당은 안 하고 용사를 하려고 해?

아들: 엄마 아빠를 지켜주려고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정의의 용사 놀이에 푹 빠져 저녁마다 아빠는 각종 괴물이 된다. 어떤 날은 아이스크림 괴물이 되어 아들의 공격을 받아 녹아내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용 괴물이 되어 불을 내뿜느라 목에서 쉰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렇게 놀다 지치면 바위 괴물이 되어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아들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낸다. 아들에겐 미안하지만 점점 바위 괴물로 변하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다.


아이는 왜 엄마 아빠를 지켜준다고 말했을까. 엄마 아빠가 지켜줘야 할 만큼 나약한 존재로 아이의 눈에 비치고 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아마 그저 사랑하는 대상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의 진짜 모습이니까.


재물이건 마음이건 사랑이건 미성숙한 사람들은 그저 받는 것에만 익숙하다. 나를 잘 챙겨주는 사람, 나만 바라봐주는 사람,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반쪽짜리 삶에 불과하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미성숙함의 발현이다. 그래서 자신의 미성숙함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미숙함을 후회하며 부끄러워할 줄 안다.


나의 20대 시절이 그랬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내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내가 싫다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것은 손쉽고 효율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이었을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진짜 기쁨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의 반쪽짜리 관계 맺음에 불과했으리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받아야 기쁠지, 왜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지 고민하고 서운해할 틈이 없다. 모든 마음의 공간이 그저 주고 싶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받으려는 마음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두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만나서 하는 것이 완벽에 가까운 사랑 아닐까. 아이를 통해 배운다. 주는 것이 진짜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엄마 아빠를 지켜주고 싶다는 아이의 순수하고도 완벽한 사랑에 가까운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데 서른 해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이 오고 하나의 세계가 온다. 한 사람이 가고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인생을 살며 그런 한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천운이 필요한 일에 가깝다. 우리가 늘 우리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그런 기쁨을 가져다주는 한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은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타인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를 성숙하게 한다. 아니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아이가 왔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것은 곧 밀도 높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뜻이며 성숙으로 가는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으로 봐야 한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래서 위대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한 사람이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의 소멸을 뜻한다. 그것은 곧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 나는 지금 몇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