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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모든 것의 끝을 분명하게 마주하는 자의 두려움

by 정 호

인간이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랑하는 모친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녀가 느껴온 날것의 감정을 기록한 일기에 가까운 소설이다.

비록 자신의 죽음이 아닐지언정, 자신과 한 몸이라고 느낄 만큼 가까운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던 모친의 죽음은 작가의 삶에 큰 충격을 불러오기 충분해 보인다.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유는 치매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적 특성과 그 앞에서 가족들이 느끼는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무기력감,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감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젠 글마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편지의 글들은 마치 전혀 다른 여자가 써놓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쓴 것은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 15p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두렵다. 어머니가 세상에 없느니 차라리 미쳐서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 17p

내가 열여덟 살 때 지녔던 어머니에 대한 그 엄청난 사랑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 절대적인 은신처의 상징이었고 나는 어머니에게 한없는 사랑을 요구하는 병적인 기아증 환자였다. - 111p

내 인생의 처음과 끝, 즉 삶과 죽음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는 내가 가진 것이라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외엔 이제 아무것도 없다. - 129p


사랑.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의 삶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는지 느껴지는 작가의 고백을 읽어 내려가고 있으면 그 커다란 사랑이 느껴져 더욱 안타깝고 그토록 거대한 사랑을 주는 존재가 곧 소멸할 것을 직감하고 있음이 느껴져 안쓰럽다.



별안간 내게 "그럼 보름 후에 결혼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런데 나는 내일 이혼을 요청하러 여변호사를 만나볼 예정이다. -20p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 31p

어머니와 나, 우리는 서로 실제적인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고 언제나 일체감 속에서 살았는데...- 42p

어머니는 내가 과자를 빼앗아갈까 봐 과자 봉지를 손가락으로 힘 있게 꽉 움켜잡고 있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로 뒤바뀐 모든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난 두렵기만 하다. - 119p

어머니는 온몸에 힘을 주어 뻣뻣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려 애를 썼다. 어머니는 용변을 본 것이다. 참담한 마음에 온몸의 힘이 쫙 빠져버린다. 무기력감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오므리고 있던 오른손으로 거칠게 나를 확 붙잡는다. 손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힘 역시 갓난아기처럼 연약하다. - 141p

다른 어떤 고통들보다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몸짓, 그리고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또 다른 온갖 몸짓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142p


허망함. 강대하고 거대했던 존재. 자식에게 부모란 어느 시점까지 늘 그런 존재로 형태를 유지한다. 치매에 걸린 부모는 더 이상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변해버린 존재 앞에서 필연적으로 딸려오는 감정은 허망함이다. 그렇게 꼿꼿했던 양반이, 그토록 꼼꼼했던 사람이 갓난쟁이와 다를 바 없는 말과 행동을 드러냄으로써 허망함은 서서히 절망의 시간을 거쳐 체념으로 바뀌어 간다.


외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 잠시 집에 모셨던 적이 있었다. 맏딸이었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기 차마 마음에 걸렸던지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도리를 해보겠다며 이미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외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왔다. 외할아버지는 평생 공공기관에서 근무 후 퇴직한 공무원이었다. 직급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현장에서 소장님 소리를 들어가며 일하는 모습과 어머니의 남매들이 외할아버지를 게슈타포라는 별명으로 불러왔다는 사실이 뒤섞이며 어린 나에게 조부는 다소 독단적이기는 하지만 강하고 꼿꼿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강하고 흐트러질 일 없을 것이라 믿었던 조부의 똥기저귀를 처음 손수 갈게 되던 날, 내 안에서 하나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외할아버지와 단 둘이 집에 있던 어느 날, 안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할아버지는 몹시 불편한 듯한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그렇게 조부의 기저귀를 갈며 마주했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나에게 치매는 너무나 두렵고 슬픈 질병이라는 것이 온몸에 각인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저녁 식사하러 식당으로 가버렸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 모습이 내 것이로구나, 내가 바로 그녀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밀착되어왔다. 어머니가 이렇게 생을 끝맺음한다고 생각하니 통렬한 고통이 밀려든다. - 21p

집에 남아 있던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가톨릭 구호품으로 내놓거나 퐁투아즈의 벼룩시장에 내다 팔 작정이다.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죄의식이 든다. - 46p

"회복될 수 없을까 봐 두렵구나"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두 손과 몸이 몹시도 싸늘했다. - 47p

어머니 곁에서 생활하던 그 자그마한 노파가 사라지고 그녀의 벽장이 텅 비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노파가 어디에 있는지 감히 물어볼 용기가 없다. - 67p


삶의 끝을 마주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끝이 품고 있는 단절성 때문에 괴롭고, 그 끝을 연장시키거나 끝으로 가는 길이 평안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모두 다 내 책임인 듯하여 죄책감이 든다. 어머니 곁에서 생활하던 또 다른 치매 환자가 사라진 뒤 텅 빈 채 남겨진 침대와 벽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한두 마디의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가령 "두렵다"라는 말이 그렇다.


외할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증조할머니는 병치레 없이 장수를 하셨다. 질병 없이 그저 노환으로 한 달 정도 집에 누워계시며 서서히 기력을 잃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쌩쌩한 기운을 자랑하며 김장을 손수 담그던 증조할머니가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시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앓아누운 지 일주가 지나고 이주가 지나자 서서히 말하기 힘들어하고 호흡이 가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가족들은 증조할머니의 죽음을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외가에 찾아가 할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았던 기억이 난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의 입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온 한마디의 말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직 죽기 싫다

가쁜 호흡 사이로 증손주의 손을 가만히 잡은 채 아직 죽기 싫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뱉었을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아니, 생각할 수 없다. 그 정도면 호상이라고, 살만큼 사셨다고, 고통 없이 잘 가셨다는 말들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가. 아직 죽기 싫다는 당사자의 외침을 다른 어느 누가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그 순간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다짐했다. 어떠한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에게 혹은 죽음을 이미 맞이한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기에.



예전에 어머니는 내게 "난 널 책임질 의무가 있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며 나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80p

어머니는 몸도 몹시 쇠약해져서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내 옷에 관심을 보인다. 항상 옷감을 만지작거리면서 "좋구나"한다. 내가 입은 검정색 긴 외투를 가리키면서 "이런 외투를 또 사게 되거든 내 것도 좀 생각해주렴!"하고 말한다. - 81p

어머니는 과자 상자를 뜯기 시작했고 또다시 과자를 먹으려고 애쓴다. 어머니는 수건이며 속치마 등을 모조리 찢어놓았고 물건들을 죄다 비틀어서 구겨놓으려 했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 같았다. 어머니의 턱은 축 늘어져 있고 입은 항상 벌리고 있다. 나는 이렇게까지 크게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나인 것만 같았다. - 85p

어머니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가던 그 끔찍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사람처럼 자꾸만 집을 되돌아보았다. - 90p

어머니는 자신의 건강한 체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건강했던 어머니에 비하면 나는 허약체질에 불과했다. - 96p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오그라든다. 자식을 당당하게 책임질 것처럼 말하던 부모의 위용이 사라지고 자신의 작은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내며 살펴주기를 기대한다. 겉과 속이 동시에 쪼그라들며 그것은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우그러뜨린다.


친할머니 역시 치매로 돌아가셨다. 친할머니는 외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길게 병원생활을 했는데 병원에 약 10년 동안 누워만 계셨다. 가끔 병문안을 다녀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젊은 날 호되게 당한 시집살이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며느리로서의 도리와 한 인간으로서의 적개심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보였다. "노인네가 아직도 옷 타령이네, 병원에 누워서 입을 수도 없는데 무슨 옷을 사 오라고 자꾸 그러냐"면서도 다음 병문안을 갈 때면 알록달록 화려한 옷을 준비해 가는 모습을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그라든 존재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할 만큼 했다는 면피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아니 에르노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시어머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타고 있는 휠체어의 제동 장치를 확인하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었는데 어머니도 몸을 숙이더니 내 머리를 껴안았다. 어머니의 이 몸짓, 바로 이 사랑을 나는 한동안 망각한 채 지내왔다. 이 사랑의 몸짓을 잃고서도 어머니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 144p


치매는 영혼의 소멸이다. 몸뚱이만 남아있을 뿐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억이나 정신활동이 일절 작동하지 않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간, 갑작스레 닥쳐오는 치매 이전의 행동양식은 마치 재난 상황에 빠진 것처럼 가족들을 격정 속으로 밀어 넣는다.


사랑이 있었다는 것, 영혼이 없어 보이는 그녀(그)가 사랑을 주던 존재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그 순간, 어쩌면 치매 환자를 돌보는 모든 가족들이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도 그 찰나의 순간 때문은 아닐까. 치매는 진정으로 가장 두려운 악마다. 피하고 싶고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악마. 그런 두려움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에,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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