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글을 쓰는 행위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서 무언가를 구해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그저 불륜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고 끝내버리기에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함의하고 있는 많은 의미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응시해온 자아의 살핌 같은 것들을 놓치는 것만 같아 몹시 얄팍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미시적 역사라는 최아현 작가의 말처럼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작가 개인의 역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세세하고 정확하게 포착하여 그려낸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은 자신을 오롯이 응시하겠다는 다짐이자 인간 내면의 작동 방식을 정밀하게 분석해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외교관과 유명 교수의 불륜이라는 소재는 대중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하기에 얼마나 완벽한 소재인가. 굳이 글로 써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아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아무 지장이 없었을 이야기였을 테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겠다는 아니 에르노에게 아마도 그것은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을 테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커다란 사건을 글로 드러내는 일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필경 연구자들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이론을 적용해보거나 의사가 자신의 수술에 최선을 다하는 일과 비슷한 결을 가진 행위였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것을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솔직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그마한 용기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담대하리만치 거대한 용기를 내어야만 우리는 솔직함에 한 발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 아니 에르노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수로서 탄탄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인간 사유의 한계와 표현의 범위는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에르노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아마 마광수 교수처럼 도덕과 윤리의 잣대에 숨이 막혀 스스로 질식해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미시적인 개인적 사건과 감정들을 너무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태도도 한몫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환경, 페미니즘, 진보와 보수, 부동산처럼 사회적 이슈라고 불리며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들은 대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거대담론이라 일컬어지는 빅 이슈인 경우가 많다. 구조와 맞물려 있는 사건이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개인의 감정이나 개인적 서사에 대한 이야기에 매몰되는 것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야 옳다. 거대담론으로 혁명을 일으키며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다수의 목숨이 걸린 일이며 옳고 그름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에 그렇다. 다만 모든 생각들은 시대의 요청에 발맞춰 그 생명을
유지한다. 거대담론보다 미시 담론에 보다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라면 이제 그 비중을 조금씩 옮겨가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함께 살펴가며 균형을 맞춰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삶을 관통하며 단순한 열정을 품게 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되돌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구해내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일 테다. 단순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렬한 그 열정 덕분에 인간은 무한할 것 같은 무의미함 속에서 명확한 의미들을 건져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