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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27. 2023

앗, 이 냄새는...

기억은 흐려져도 각인은 영원하다

편의점 음료 코너 아래쪽에 진열된 음료를 꺼내려고 쭈그려 앉았다가 어떤 냄새를 맡고 18년 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특정한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때 그 순간의 기억과 감정이 흐릿하지만 강렬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수능을 마치고 갓 스물이 되어 편의점에서 세 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늦은 밤 찾아오는 취객의 진상을 어르고 달랬던 일, 열한 시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실론티와 솔의 눈을 한 아름 사가던 근처 노래방 웨이터의 허둥대는 뒷모습, 새벽 들어오는 식품을 정리하던 일, 늦은 새벽 찾아오는 트럭과 택시기사 운전수들의 정기적인 담배와 커피 구입 목록, 어슴푸레하게 하늘이 밝아지면 찾아오던 학생들의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는 마치 고요한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아침을 알리는 소리와 닮아있었다. 

 

편의점 냉장고 아래에서 맡게 된 어떤 냄새와 함께 이런 기억들이 불현듯 딸려 올라온다. 시각으로 마주할 때보다 후각이나 미각, 청각과 어떤 기억이 더 강렬하게 연결되어 갑작스레 떠오를 때가 많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오감 중 가장 의지하게 되는 것은 시각이겠지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일을 할 때는 시각만큼 게으른 감각이 없다.


편의점은 언제나 시원하고 쾌적하다. 걸어 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던 냄새를 쪼그려 앉자 강하게 맡게 된 이유는 차가운 공기가 아래에 깔려있었기 때문일까, 어떤 기억들은 그렇게 차가운 공기처럼 낮게 깔려 더 이상 의식의 수면 위로 상승하지 않기도 한다. 그 냄새와 함께 딸려온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느라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관념으로만 내 생 안에 담아둔 것들은 세월과 함께 흘러가버린다. 지식이 그렇고 이상이 그렇고 행동하며 감각해내지 못했던 모든 것이 그렇다. 하지만 감각에 새겨진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어 갔을지라도 어느 순간 다시금 폭발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감각을 통해 새겨진 것들은 내 몸에 직접 각인된 기억이기 때문에 그렇다.


많이 해보라는 어른들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서려있었으리라. 먹어보고 맡아보고 들어보고 만져보고, 온 힘을 다해 오감에 기억을 저장해야 하는 이유, 결국 그것만이 생생하게 삶의 흔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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