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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01. 2023

한약과 양약, 뭐가 더 과학적인가요?

교육에도 한약과 양약이 필요합니다

"한약? 그런 거 효과 하나도 없어. 아프면 바로 병원 가서 약 먹고 시술받아야지."


"양약은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뿐, 본질적인 치료는 뿌리부터 다스려야 해. 자생력을 기르는 것, 그것이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야"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일반인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대화다. 한약과 양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으니 언뜻 듣기에 둘 다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린다. 어느 말이 옳은지 그른지, 양약과 한약 중 어느 것이 치료에 더 효과적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인의 입장에서 둘 다 맞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증상과 때에 따라 적절히 한의와 양의를 병행하며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갈 테다. 면역력이 약해지고, 신체 기관의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며, 근육이 뭉쳐 혈류를 방해하는 것 같은 경우에는 한의사의 도움을 받아 속부터 서서히 채워 자력으로 신체기능이 회복될 때까지 정성을 기울일 수 있다. 하지만 급성 맹장염이나 교통사고가 나 팔다리가 부러진 응급환자를 처치하기 위해 우리는 보통 한의원에 가지 않는다. 촌각을 다투는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칫 잘못하여 골든 타임을 놓친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사고이기에 그렇다.


2023년 교실은 위급상황이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은 점점 더 난폭해지고, 그런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권한이 교사에겐 전무하다. 교실에서 교사가 행하는 모든 교육적 행위는 언제고 고소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아주 작고 사소한 예를 하나 소개해본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자리를 바꿀 때 우리 반 학생이 홀수인 경우 어쩔 수 없이 혼자 앉게 되는 학생이 1명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 1명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교사의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제비 뽑기나 좌석배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무작위 배치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짝꿍이랑 앉게 될지언정 그 과정에 있어서 교사의 주관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교사를 걸고넘어질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자리하나 바꿀 때도 누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고소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현재 교사들이 처한 입장이다.


하지만 교실은 교육의 공간이다. 단순히 국영수 교과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역량이나 관심도에 따라 일상의 모든 것이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말인즉, 자리배치 하나를 할 때도 교육적 의도를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아이와 짝꿍이 돼도 끊임없이 부딪히는 아이가 있다. 이런 아이의 경우 차라리 혼자 앉혀서 다툼을 예방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혼자 앉자 수업 중 평온하게 교사와 눈 맞춤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학습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 학업성취도가 높아져 친구들과의 관계가 개선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자리배치 하나에도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최선의 교육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매일 고심하는 것이 교사의 일이다. 교사에게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중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교육적 행위는 교사의 주관에 따라 선택되며 그 선택은 반드시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체험학습을 갈 때 어느 짝꿍과 앉을 것인가, 급식 먹을 때 순서는 어떻게 정할 것인가, 짝꿍은 얼마의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바꿀 것인가, 이런 사소한 일상의 영역에 어찌 중립이 있을 수 있을까. 교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장 교육적이라고 판단되는 선택을 한다.


모든 것을 무작위로 추첨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이는 교육적 의도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해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실제로 이런 요구를 하는 학부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무작위 선택이건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결정이건 그 둘의 종착점은 같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다. 생존을 위한 자기 보신이다.


그래서 아동학대라는 단어는 무섭다. 교사의 모든 교육적 행위를 아동학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법령이 너무도 주관적으로 해석 가능하게 됨으로써 교사와, 교실과, 대부분의 선량한 아이들은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최근 몇몇의 사건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집에 보이기 시작하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번식해 있는 것처럼 최근 이슈되고 있는 교육계의 아픔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 만연해 있는 만성염증을 진단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가며 스러지는 신체를 되살리기 위해 오랜 시간 보약도 먹고, 뜸도 뜨고, 자연 치유도 해보고, 맑은 공기도 마셔봤지만 해결이 안 되고 증상이 더욱 악화된다면 과연 어찌해야 좋을까. 죽을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당장 병원에 가서 상처를 도려내거나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고 인내하다가 결국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더 이상 힘들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인내해 봤다면 이제는 과감하게 다른 수도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만능이 아니다.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 있을 때에서야 그나마 가능성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 교육이다. 기준과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교육은 무용하다. 뿌리가 튼튼해야 물을 줘도 열매가 맺을 텐데 뿌리가 죄다 썩어있는 판국에 자꾸 여기저기 물만 주라고 하니 제대로 열매를 맺을 리 없다.


그토록 교육을 무시하면서 교육이면 또 다되는 줄 아는 것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는 생각일까. 학교에서 사안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학생 교육, 교직원 교육 강화다.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 학습 사이트를 이용하여 수행평가를 해야 했고 평가를 위해 학생 계정을 일괄 생성 후 학생들에게 안내했더니 학생들이 다른 학생의 ID와 비밀번호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 학생들이 타 학생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여 수행평가 성적을 열람하고 삭제하는 등의 불법행위가 발생했나 보다. 이렇게 명확한 잘못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분명히 처벌을 해야 옳지만 우리나라는 소년소녀들에게 너무나도 관대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대안이랍시고 나오는 것이 고작해야 학생들에게 개인정보 보호 교육을 강화하라는 지시다.  


이는 무효할 뿐 아니라 도리어 교육에 방해가 된다. 항상 문제 상황은 "일부" 학생들에게서 발생한다.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대부분의 선량한 학생들에게는 저런 교육이 이미 필요가 없다. 남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해서 기록을 삭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 있을까? 대부분의 학생은 저지르지 않는 문제 행동이며 특별히 교육할 필요가 없기에 무효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부"학생들은 교육을 들어도 또 반복해서 문제를 만들기에 무효하다. 그리고 이런 각종 교육은 학교에 차고 넘치게 많다. 각종 교육을 실행하기 위한 페이퍼 워크를 생산하느라 교사는 수업 준비와 학생 대면할 시간을 빼앗긴다. 결국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기에 교육에 방해가 된다.


인간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을 했으면 일벌백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믿어주고 믿어주고 또 믿어줘도 사고를 치는 아이라면 따끔하게 혼이 나야 한다.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학습된 현재에 이르러 더 이상 허술한 믿음만으로 문제 상황이 나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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