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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07. 2023

뭐가 그렇게 안쓰러울까

위로와 공감도 적당히

손톱을 어떻게 깎는지 상급자에게 물어보는 군인, 우리 아이는 매번 자가용으로 데려다줘서 지하철을 탈 줄 모르니 집에서 현장체험학습 장소까지 직접 인솔해 달라는(고등학생인데) 학부모의 요구.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며 아주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꽤 종종 발견되는 신인류다. 대체 자식을 어떤 존재로 키워내고 싶은 것일까?


군대에 와서야 처음 스스로 손톱을 깎아보게 되었다는 푸른 머리의 군인에게 청년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럽다. 인생의 최 전성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절정에 도달해 무르익은 존재를 우리는 청년이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청춘을 그리워하고 청년을 빛나는 존재로 바라본다. 우리에게 청춘과 청년은 그런 상징이었다. 과연 스무 살이 넘도록 손톱을 혼자서 깎지 못한 인간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이십 대를 회상하며 청춘을 그리워하게 될까? 그가 그리워할 자기 인생의 절정의 순간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제 청춘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청춘이라는 단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육아의 최종 목적지는 독립이라는 육아전문가의 말은 명백한 진실이지만 누군가의 귀에는 공염불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많아지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자니 청년이라는 존재가 점점 귀해질 것 같다는 슬픈 확신이 든다.


부모가 자식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마음이야 당연하겠지만, 모든 순간 그렇게 아이를 대해서야 대체 언제 아이가 스스로 걷고 뛸 준비를 할 것인가. 부모는 대행자가 아니라 조력자여야 한다. 한데 어찌하여 조력을 통해 아이를 성장시키기보다 대행을 통해 아이의 성장을 가두는 부모가 더 득세하게 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다는 착각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불안이다. 어린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늘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먹을까, 몸을 제대로 못 가눠 다칠까,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 날카로운 물건에 베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커감에 따라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불안을 껴안은 채 도전을 지원해야 한다. 모든 부모는 불안해한다.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싶은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는 것이 부모의 숙명이라지만 그런 마음만으로 아이를 제대로 길러낼 수는 없다. 스스로의 힘을 통해 쟁취해 나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른은 없다. 대체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도울 필요는 없다. 넘어져도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혼자 일어서야 하는 것이고 혼자 학교 갈 나이가 되었으면 혼자서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위로와 동정이 아이를 망친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를 구원해야 할 때 필요한 위로를 우리는 남용하고 있다. 마음을 읽어주었다면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 떼쓰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랬구나~ 짜증 났구나~"라고 말한 뒤 아무런 행동수정을 요구하지 않는 성인을 바라보며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일갈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인데 우리 사회는 대체 무엇에 씐 것인지 점점 호통을 터부시 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혼내는 것이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모조차 자식을 혼내지 않으려 한다. 잘못된 행동을 보이는 아이를 앞에 두고도 "우리 애는 괜찮으니 그냥 놔두세요"라는 말은 분명한 방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통보다 차라리 방임을 선택하는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위로와 호통은 두 눈과 같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 어려울뿐더러 금세 어지러움이 찾아온다. 시도 때도 없이 호통치며 억압하는 부모가 자녀를 망치듯 시도 때도 없이 위로만 하고 있는 부모 역시 자녀를 망친다. 현재 30~40이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세대였다면 앞으로 다가올 세대는 지나친 위로와 공감으로 인해 방종의 끝을 달리는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식을 자꾸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온 자식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안쓰럽게 바라봐온 자식은 기어코 안쓰러운 사람이 되고야 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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