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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26. 2023

우리는 어떤 시를 남길 것인가

이창동 감독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감독이 만든 영화가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영화에 조예가 깊지 않아 그저 배우나 장르만 보고 영화를 선택해 왔었는데 넷플릭스 채널을 돌리다가 "시"라는 영화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윤정희라는 배우도 내 나이 또래에게는 익숙지 않은 분이고 이창동이라는 이름 역시 대중적이지 않고 약간 어려운 예술 영화를 만드는 분이라는 어렴풋이 흘려들은 정보가 다였던 탓에 영화를 볼까 말까 망설인다. 주인공인 미자(윤정희)가 일상을 살다가 시에 관심이 생겨 시를 배우러 다닌다는 영화의 줄거리만 보고 단순히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초보 문인의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영화를 봤다가 그만 생각지도 못한 묵직함에 숨이 막히고 만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창동 감독이 제작한 작품이 무엇인지 검색해 본다. 버닝, 밀양, 오아시스, 박하사탕,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초록 물고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인줄 모르고 봤던 영화가 제법 된다. 삶의 진실을 다루는 감독이었구나. 쉽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머릿속에 각인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을 기본 뼈대로 하고 있다. 주인공 미자(윤정희)의 시에 대한 열정과 손자의 집단성폭행 사건이다. 미자는 "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의복을 화려하게 갖춰 입고 다니고 손자에게 늘 몸을 깨끗이 하라고 당부한다.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표현해내고 싶어 시 쓰기 수업을 듣는다. 러나 시가 어디 그리 쉽게 쓰일만한 것인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수첩에 자신의 짧은 감상을 끊임없이 기록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자가 수강 중인 시 쓰기 수업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에 대해 발표하는 장면이 있다. 여러 등장인물이 한 명씩 자신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행복한 장면을 발표하는 모습이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어 나오는데 배우들의 실제 이야기라고 하니 영화의 묵직함이 한껏 배가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자란 손녀가 노래를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야기, 자녀를 낳을 때 마치 태양처럼 뜨거운 어떤 강렬한 존재를 내가 창조해 낸 것 같았던 경험, 아무리 떠올려봐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며 멋쩍어하며 평생 연립 반지하에서 이십 년을 살다가 얼마 전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8만 원 임대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 가장 아름다웠기억이라고 말하는 남성, 성당에 핀 나뭇잎이 너무 예뻐 그것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여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어 괴롭지만 그 괴로움마저 아름답다고 말하는 한 여성. 서너 살쯤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무척이나 예뻐해 줬던 기억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 미자. 우리는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쩌면 분절적이고 조각난 기억만을 움켜쥔 채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기억, 불행했던 기억, 좌절했던 경험, 열광적이었던 경험, 우리는 이렇게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주섬주섬 갈무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요?" 미자가 우연히 발을 들인  사랑 회원들과의 식사자리에 찾아온 김용택 시인에게 미자는 묻는다. 시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모든 예술적 창조행위를 수행한다는 것은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것과 같다. 시상을 떠올린다는 것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바라보려는 행위이며 그렇다면 다시 말해 시를 쓰려한다는 것은 아름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를 불우는 일과 같다. 시를 쓰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를 쓰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김용택 시인의 시 쓰기 수업 마지막 시간, 유일하게 시를 써서 제출해 낸 수강생은 미자 한 사람이었다. 시를 쓰기가 너무 어렵다고 투정하는 어느 수강생의 말에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는 게 어려운 것이라 답한다. 그렇다.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 대단한 이유는 아름답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아름답게 살겠다는 의지를 지켜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사는 모습은 아름답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행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의지를 지켜내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두려워, 먹고살기 바빠서,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외면하며 살다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시"는 삶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배경 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그 덕에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흘러나오는 강물의 흐르는 물소리가 선명하다. 두운 색의 강 아래로 카메라가 내려가며 물소리는 점점 커진다. 마치 물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의 손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가 이렇게 홀로 무섭고 비참하게 가라앉았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득 이창동 감독은 름다움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이렇게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자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기로 하고서야 시를 쓸 수 있었듯, 진정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침침하고 축축 고단한 삶의 단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제야 우리의 삶은 아름다움을 담은 한 편의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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