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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Dec 04. 2023

영하의 바람

매서운 시절을 버텨내기를

4~5살쯤의 기억이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최초의 유기불안을 경험했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어쩌면 이미 버림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더욱 세게 현관문을 두드리다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던 기억. 아주 어릴 때의 일이라 성장하며 다른 기억들로 하여금 조금씩 희미해져 갔지만 당시의 상황과 장면을 떠올려보면 어린아이가 분리불안이나 유기불안으로 느낄 공포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적막감, 외로움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완벽한 고립감, 어린 시절 가족과의 단절은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새겨 넣을 수 있다.


주인공 영하는 세 번의 유기 경험을 치른다. 각각의 경험은 꽤나 큰 사건이어서 결국 영하를 외톨이로 만든다. 세상 앞에 홀로 던져 영하의 삶이 예상되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12살 영하는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다가 엄마에게 남자가 생겨 아빠에게 보내진다. 이삿짐 트럭에 아이만 덜렁 실어서 아빠에게 보내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런 부모도 있다는 것이 이제는 놀랍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영하의 엄마가 목사를 꿈꾸고 있다는 점이 조금 역겨운 지점이기는 하나 온통 모순 투성이인 세상에 그 정도 모순은 어쩌면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것도 슬픈 일이지만 12살의 영하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영하가 이사 올 것을 알고 이미 아빠가 도망가버렸다는 사실이다. 영하는 다시 이삿짐 트럭을 타고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엄마의 집 앞에서도 한참 동안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자 어린 영하는 불안에 떨게 된다. 영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하루로 각인되었을 그날은 완벽한 유기불안을 경험한 시간으로 기억에 남게 되리라. 15살 영하는 사촌인 미진과 헤어지게 된다. 영하의 사촌이자 단짝친구인 미진 역시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할머니의 사망과 함께 미진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아침마다 학교에 같이 갈 정도로 질풍노도의 중학생 시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를 잃어버린 영하는 또 한 번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19살의 영하는 진 일을 겪는다. 7년 동안 영하를 따듯하고 살갑게 대해온 계부는 술을 먹고 저질러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그로 인해 영하는 충격을 받고 유일한 믿을 구석인 엄마에게 사실을 털어놓게 되지만 목사 안수를 위해 배우자가 필요했던 하의 엄마(은숙)는 영하에게 한 번의 실수니 없었던 일로 묻어두기를 권한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에서 일상을 보내야 하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사촌 미진에게 자신과 함께 집에 있어줄 것을 요청하는 영하, 미진은 영하의 도움 요청에 망설이지 않고 영하의 집인 부산으로 내려온다. 숙은 모든 것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그녀가 늘 영하에게 내뱉던 말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말을 실현이라도 하려는 듯 집을 나가고 만다. 계부와 둘이 살 수 없었을 영하는 미진과 함께 집을 나서 고시원에 방을 얻는다. 영하는 술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미진은 아르바이트에 끊임없이 지원서를 넣는다. 계부는 죄책감에 살던 집을 정리하고 얼마쯤의 돈을 영하가 일하는 가게 사장에게 전하며 영하에게 꼭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긴 채 사라진다. 돈을 전달받은 영하는 분노하는 마음으로 집을 찾아가지만 이미 집 안의 모든 살림이 빠져나간 집은 언제 그곳에 영하가 살았던 적이 있었냐는 듯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비워져 있다. 집 앞 쓰레기장에는 가구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덩그러니 버려져있다.


하나님,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 버림받은 소녀들, 영하와 미진은 끊임없이 기도한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영원히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그러나 그녀들의 기도에도 무색하게 신은 소녀를 외면한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은 소녀들에게 무색할 뿐이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그늘진 곳에 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었을까. 전지전능한 신은 어찌하여 세상의 그늘을 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삶의 그늘을 마주할 때마다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엄마 내가 잘했어", "엄마는 곧 돌아올 거야 내가 알아. 엄마도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영하는 모든 것을 묻고 살자는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아직 어린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를 옹호한다. 엄마는 언제고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자 현실부정은 영하의 바람이다. 이 믿음과 바람이 꺾이는 탓에 세상 모든 불행은 시작된다. 영화를 제작한 김유리 감독은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당한 행위 이전에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제작했다"라고 한다. 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부모의 방임이다. 힘들어서,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여,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든 부모는 유죄다.


가족이라는 뿌리가 완전히 소멸된 뒤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영하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미진이다. 영하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선뜻 달려와주고 고시원에 1인분의 방값만 내고 지내다가 걸려 쫓겨나게 된 상황에서 말없이 혼자 방을 비우는 미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완벽히 유기된 영하를 안아주며 친구의 곁을 지켜준다. 영하의 입장에서 미진은 신적 존재나 다름없는 든든함을 보여준다. 유리 감독은 "누구에게나 영하의 바람이 몰아치는 시기에 단지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어 왔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영화를 완성했다"라고 밝혔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때였던 중학교 시절 내 곁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이유 없이 내 편이 되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 새벽에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 연락을 하면 츄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동네 놀이터에서 모기에 물려가며 함께 밤을 지새워주던 친구, 학교가 끝나면 함께 어묵을 먹고 오락실에 가고 만화책을 빌려보며 별것 아닌 이야기에 깔깔대며 근심을 잊게 만들었던 친구, 나쁜 생각을 털어놓으면 호되게 혼을 내던 친구, 내 인생 영하의 바람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던 그 친구 역시 영화 속 미진과 같은 존재였다. 감독의 말대로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 그 친구 덕에 자칫 엇나갈 수 있었을 인생을 부여잡고 힘든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영화 속 영하와 같은 아이들이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다. 그 아이들이 매서운 칼바람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잠시만 버티면 분명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일러줄 그런 존재가 곁에 꼭 한 명쯤은 존재할 수 있기를.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 정도는 제발 좀 도와주기를 간곡히 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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