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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06. 2024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믿음에 대한 작은 균열은 아이의 마음에 무엇을 심어줄 수 있을까

아들: 와하하 내가 이겼다!

아빠: 그래 이겼으니까 큰 숫자 카드 가져가

아들: 오예 오예, 아싸 아싸~(신이 나서 허공에 팔을 휘젓는다)

아빠: (몰래 카드를 바꿔치기하며) 자 이번엔 무슨 카드를 낼 거야?

아들: 비밀이야~ 아빠를 이기려고 가장 큰 숫자를 낼 거야

아빠: 그래? 근데 아들 조금 전에 카드 제대로 가져간 거 맞아?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아들: (자신과 아빠가 조금 전 가져간 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아빠~아! 나를 속였어어~!

아빠: 세상에는 남을 속이는 사람도 많아. 기분 좋다고 신나서 흥분하면 그 틈을 타서 아들을 속이고 아들걸 뺏어가는 사람들도 있어. 그러니까 항상 잘 쳐다보고 있어

아들: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아빠: 그럼~ 아들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어. 아빠는 아들을 안 속이지

아들: 알아. 그래도 아빠는 그러면 안돼~


보드게임 포세일을 했다. 서로가 가진 숫자 카드를 내놓은 다음 뒤집어서 서로의 카드를 확인하고 더 큰 숫자를 낸 사람이 점수 카드를 가져가는 방식의 게임이다. 이 게임은 애초에 신뢰나 믿음 같은 개념이 승패에 영향을 끼치는 게임은 아니지만 아이가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 아이 몰래 점수 카드를 바꿔치기해 가져간 뒤 아이의 반응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억울해하거나 세상에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던 아빠라는 존재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래도 아빠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믿어주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일은 도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가. 믿는 사람은 으레 믿음에 대한 상호등가적이거나 상호대차적인 피드백을 기대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세상에는 믿을만한 놈과 믿지 못할 놈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살아가는 통에 기대했던 믿음에 대한 환류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는 어쩌면 아비의 장난에 최초의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그래도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아,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배신의 슬픔을 알게 한 것은 아닌가. 아버지들은 아이가 어차피 언젠가 겪게 될 일에 대해 늘 알려주고 싶어 한다. 혹여나 나중에 더 큰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예방주사를 놓아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들의 마음일 테다.


스무 살 수능 재수를 할 무렵이었던가. 무뚝뚝한 아버지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란다. 남을 너무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단다.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그런 내용의 편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친구로부터 몇 번의 사기를 당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간곡히 전하고 싶었던 삶의 통찰이었으리라. 그렇게 부모는 자신이 겪은 통한의 고통을 자녀가 반복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 자꾸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이 대부분 재미없는 잔소리처럼 들리기에 자식들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언제나 문제 이긴 하지만.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과 자식이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부모로부터 자녀로, 또 그 자녀에서 자녀로 대를 건너 전승되며 기대와 염려를 동시에 전한다. 아빠는 그러면 안 되지!! 라며 작은 배신감을 통해 경계의 마음을 네 안에 심을 수 있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아들아, 아빠는 앞으로도 꾸준히 그런 이야기를 할 예정이야. 네가 아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나이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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