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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06. 2020

인간이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날이 올까?

관찰할 때와 관찰당할 때.

넷플릭스에서 커넥티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자연을 관찰해서 예상치 못한 것들의 상관관계를 밝혀낸다는 내용이었다.


  번째 에피소드는 개똥지빠귀에 관한 내용이었다. 북미 지역에 서식하는 개똥지빠귀를 관찰하던 한 조류학자는 신기한 인과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 연구의 시작은 "개똥지빠귀가 어디로 이동하는 것일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 그런 호기심이 생겼는지 나에게도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의 호기심은 나의 호기심과 달리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숲 속에 설치해 개똥지빠귀를 포획한 다음 그 새의 등에 조그마한 위치추적기를 달아두고 몇 년 동안 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이다. 추적의 결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북미지역에서 브라질까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한데 북미지역에서 브라질로 출발하는 시기가 해마다 다른 것이 포착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조류학자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먹이 수급 문제인가? 포식자의 출현 시기와 관련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가설들과 수집된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연구를 진행하던 중 이 조류학자에게도 무언가 영감이 떠올랐던지 문득 태풍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단다. 그래서 개똥지빠귀의 이동 시작 시기와 북미지역의 허리케인 발생 시기를 연구해보았더니 그 해 미국에 하리케인이 강하고, 자주 발생할수록 개똥지빠귀는 브라질로의 이동을 서둘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똥지빠귀가 어떻게 허리케인을 예측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동시기와 허리케인의 발생 빈도, 강도는 정확한 연관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한 조류학자의 순수한 호기심이 밝혀내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돼지의 표정을 관찰하는 연구였다. 안면인식 기술을 돼지에게 적용해 농장에서 돼지의 다양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연구자는 동물이 행복한 순간을 포착해내고 그것이  동물복지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돼지는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가축이고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이 연구를 시작하게 만들었고, 행복한 돼지는 번식력도 강하기 때문에 생산량 또한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이야기하며 동물복지적 차원과 자본주의적 차원,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영역의 경계를 아우르며 연구의 당위를 찾아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동물 하나하나를 구분해낼 수 있기에 수많은 동물이 모여있는 거대농장에서도 한 마리 한 마리의 인생을 추적해가며 연구할 수 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빅브라더의 전형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연구자의 선한 의도가 인류와 동물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고 싶어 졌다.

 

 마지막으로 관찰의 대상을 인간으로 돌렸다.

스마트폰과 어플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거대기업과 국가권력은 개인의 정보를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각종 sns에 스스로 업로드하는 우리의 사진을 분석해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생활의 패턴마저 읽어내어 우리에게 적합한 조치를 취하고 때로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들이 원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이 다큐에서는 말한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보다 보면 내가 검색한 것을 기반으로 비슷한 취향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띄워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광고조차도 내가 관심 있어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서 띄운다. 이것은 개인에게 소비를 유발하고 기업은 이윤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나에게 딱 맞는 맞춤형 소비의 기회가 제공된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손쉬운 마케팅 타깃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첫 번째 관찰에서는 그 어떤 윤리적 결함도 느끼지 못했고 두 번째 관찰에서는 약간의 찝찝함을 느꼈다고 한다면 세 번째 관찰에서는 상당한 불쾌감을 인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셋 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공통점이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어 우리의 세계를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은 관찰당하는 대상이 인간, 즉 내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불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내가 아닌 동물들이라면 얼마든지 관찰이 가능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해 가면서도 우리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그 정도 윤리적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는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타깃이 인간이 되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물원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물원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멸종위기에 처한다면 동물원에 보호되는 동물들처럼 사생활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이 다큐멘터리의 마무리 멘트는 언젠가 정말로 그런 날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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