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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31. 2020

남아있는 한 조각의 빵

버릴까, 먹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식빵 한 조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침 식사 혹은 간식거리로 식빵을 먹다가 요 근래 다른 먹을거리들이 집 안에 한 동안 풍족했던 모양인지, 먹다 남은 식빵 한 조각이 꽤 오래도록 냉장고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다른 간식거리에 비해 식빵은 유통기한이 짧다. 보통 구워져 나온 후 일주일 정도의 유통기한을 가진다.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인지했던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식빵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되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먹거리들에 눈이 쏠려 한 동안 식빵에 눈길을 주지 않았더니 유통기한이 언제 이렇게 까마득하게 지났는지 왠지 먹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타이밍을 놓친 탓에 상당한 시간 방치된 식빵을 뱃속으로 집어넣기가 거북스러웠던지 우리 식구  누구도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식빵을 먹어치우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


이 애매한 잔여물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첫 번째 불편함은 남아있는 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할 수 있으면서도 처리하기를 머뭇거리는 데에서 오는 애매한 신경의 소진이다. 유통기한이 지났기에 먹기가 꺼려지기는 하지만 먹으려고 한다면 또 언제든지 먹을 수 있기에, 먹는 것도 버리는 것도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손쉬운 문제 이건만, 애매한 상황 속에 흘러가는 시간만 붙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에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미세하게나마 분명히 일정 부분 존재하는 것 같다.  


두 번째 불편함은 남아있는 것이 있기에 동류의 새로운 물품을 구입하기가 꺼려지는 데에서 오는 소비의 지연이 우리의 행복까지도 지연시킨다는 점이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은 냉장고에도 적용된다. 냉장고에 쌓여 있는 재료들은 빨리 소진될수록 그만큼 신선한 식재료를 섭취했다는 것을 뜻하며 금세 새롭고 신선한 재료들로 그 공간은 다시금 채워진다. 하지만 남아있는 한 조각의 빵은 그 빵이 가지고 있는 부피보다 훨씬 큰 공간을 차지하며 냉장고 한편에 떠억 버티고 있으면서 새로운 식빵이나 다른 식재료가 들어올 공간을 내어주지 않고 있다.


계륵 : 버리기도 갖기도 애매한 것.


내가 품고 있자니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 차마 기꺼이 품어지지 않는 것, 하지만 버리려고 생각하 왠지 쓸모가 있을 것만 같고 그간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져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존재 가치를 애써 뒤적거려 찾아보며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들...

우리 주변에는 사실 이런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사용하지 않아도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저장 강박증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지만 끊임없는 고민을 당사자에게 가져다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망설임은 그 자체로
사람을 소진시키는 행위이다.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해 숙고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 시간은 반드시 에너지를 소비하게 한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끝에 선택한 결과가, 쏟아부은 에너지가 아깝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면야 얼마든지 숙고의 시간이 길어져도 좋을 테지만 크게 중요치 않은 문제라는 판단이 설 때에는 망설임의 시간을 줄여 에너지와 감정의 낭비를 막아내야 한다.


탕수육을 먹을 때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하나를 더 먹으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명언의 반열에 올라도 아깝지 않다.

놓아줄지 품고 갈지 고민하지 말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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