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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만큼 바로 돌려줘야 한다는 착각

by 선홍
카페드로잉


저는 남한테 싫은 소리 듣길 두려워합니다.

배짱이 없는 걸까요.

그런고로 남한테 뭔갈 받으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선물을 받아도 온전히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결혼한 후에 더 심해졌는데, 시어머니와의 대화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은 항상 뭔가를 나눠주기 좋아하시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계속 받기만 하는 사람을 보면 밉더란 겁니다.


아니, 상대가 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좋아서 줘놓고 왜 그러시는 걸까요.

아무리 좋아서 한 일이라도 상대가 한 번쯤은 선물해 주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그럼 주는 걸 그만두시라고 해도 이미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답니다.


역시 안 주고 안 받는 게 최선인가요.


친한 지인의 생일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기억 안 나지만 'X톡'선물하기를 했습니다.

선물이란 얼굴 보고 전해줄 때 제대로 즐거운 법인대요.

서로 바빠 만남을 미루다가 'X톡'으로 서로 생일선물을 하니 상당히 건조하고 의무적으로 느껴지더란 말입니다.


받아도 그리 즐겁지가 않아 이번엔 상대에게 생일축하문자만 보내봤어요. 그래야 만나서 전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전달될 것 같아서.

그랬더니 상대는 내 생일 때 'X톡'으로 또 선물해 줬습니다. 나만 받은 기분이 역시나 불편합니다.


친구 두 명에게 밥을 산 적이 있었어요.

생각지도 않는데 한 명이 답례로 티백상자를 사주는 겁니다. 인간마음이 웃긴 게 순수한 내 성의를 이렇게 받다니, 너무 깍듯하게 구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동시에 선물 안 하는 다른 한 명은 뭐냐는 뚱딴지같은 심보가 생기더란 말이죠. 그러면서도 답례를 하지 않은 상대가 날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좋더란 말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에너지가 아주 낭비되는 느낌입니다.


주고받기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결혼식, 장례식 때입니다.

받은 축의금, 조의금 리스트를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이런 게 인간사회구나, 감탄하면서.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부모, 자식에게도 주고받기를 하고 있네요.

언뜻 보기에 상당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한 것이 답례로 돌아오면 우린 여기까지야, 선 긋는 기분이 들어요.


그냥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 그런가 봅니다.


명절 때 형님들에게서 홍삼, 애들 세뱃돈까지 푸짐하게 받았습니다. 평소와 달리 왜 이러실까 당황해 어떻게 갚을까 당장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했어요.

남이라면 불편해 바로 답례했겠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가족으로 진짜 느껴졌으니까요.

신혼땐 시댁이 그저 불편한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받았을 때의 불편함도 참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답례를 하지 않으면 상대가 날 욕할까 봐 두렵고, 스스로 선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욕하지 않겠지만 욕 좀 하면 어때요, 담에 내가 한턱내면 되죠.

영원히 받기만 하려는 심보가 문제잖아요.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난 선물 받을 가치가 충분한 사람이라고.

그래야 서로 진정한 신뢰가 쌓이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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