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레는 마음

바나나에서 여행까지

by slow snail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움'이라는 철학을 가슴에 담고 산다. 네모 반듯한 실내 선이 살아 있도록 말갛게 도배가 되어 있고, 주인의 삶을 보여줄 최소한의 가구와 가재도구만 있는 집이 내가 지향하는 집이다.


현실은... 현타가 온다.

현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가구원수만큼의 신발 한 켤레씩 + 각자 용도에 따른 여벌의 신발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매일 사용하는 자전거 용품이며, 채 열지 못한 택배 물건들로 현관은 북적거리는 번화가처럼 번잡스럽다.


언젠가는 펼쳐보기를 바라는 책들로 가득한 거실, 아침에 읽다 만 책이 펼쳐진 채로 뒤집혀 있고, 인덱스며, 필기구들, 잡다한 용품들이 질서 없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다.


투명한 유리로 천정의 실내등만 반사해 놓으면 좋을법한 식탁은 누군가 먹다 남긴 물이 든 컵과 한편에 모아둔 각종 건강보조식품이며 안구건조증에 쓰이는 종류별 안약들로 가득 찬 수납박스가 한켠에 자리하며 시야를 막아선다.


거실에서 공부를 해야만 잘된다며 한 권 두 권 쌓여있는 아이의 책, 필수인 각티슈, 요리하며 조정하기 쉽게 가져다 놓은 블루투스 스피커, 아이들 먹기 좋게 올려놓은 과일이며 간식바구니, 언젠가 보거나 소용될 거란 생각에 버리지 못한 잡다한 일상의 물건들이 쌓여만 가는 아일랜드바는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 마법의 공간이다.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 건 돈, 체력, 에너지 정도면 충분할 텐데...


어느 아침 포장된 비닐도 뜯지 않은 바나나 한 손이 정리하는 눈을 잡아끌었다.

바나나는 Dole 이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무참히 깨고 남편이 사다 놓은 새로운 브랜드의 바나나였다.


MANNADA BANANA
원산지 : 에콰도르
수입원 : (주)진원무역


어머나!

"바나나야~, 너 에콰도르에서 왔니?"

"거긴 어디야? 공기와 습도는 어때? 그곳은 어떤 냄새가 나는 곳이니? 산과 강의 모습은? 그곳은 바다가 있니? 그곳은 어떤 사람들이 사니?"


태어나서 대한민국땅 경상도 지역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40여 년의 인생이 한 송이 바나나 인생에게 질문을 퍼붇기 시작했다.


바나나는 필리핀이라 막연한 고정관념을 가진 나에게 에콰도르에서 온 바나나는 온갖 질문과 함께 그곳을 그려보게 했다.

네이버

지도에서 그곳을 검색해 본다.

남아메리카 북서부 콜롬비아와 페루 사이에 있는 나라였다.

위도상으로 커피도 자랄 것만 같은 나라였다.

나는 그곳을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페루에 대해 아는 짧은 지식을 빌려 그곳의 자연환경을 힘껏 그려 보았다.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관광이 아닌 현지를 여행하고 싶었다.

여행을 동경하지만 여행을 잘 안 한다.

무던하다 생각하는 나는 사실 잠자리와 화장실과 물과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지만 낯선 곳은 곧 육체의 고통을 몰고 오곤 했다.

음식과 물, 잠과 샤워등 기본적인 필요들의 변화는 심한 두통을 유발해 거의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충족은 여행프로그램과 책을 읽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테마기행'은

번잡한 사람들에 부대끼는 수고로움과 육체의 불편을 겪지 않고도 타문화를 접하는 여행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무한 기여를 해 주었다.


간간히 읽는 다른 나라의 문학 속에서 그려지는 무심한 그들의 일상은 마치 내가 그들 가운데 태어나서 자란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그들의 문화에 빠져 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바나나의 원산지 에콰도르를 보는 순간,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영상이 아닌, 몸으로 하는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노란 바나나는 꿈을 꾸게 했다.

여행을 위해 경비를 어떻게 모아야 할지,

언제쯤, 누구와, 어느 곳을 여행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 평소에 기초체력을 많이 키우기 위해 규칙적 운동부터 해 두어야겠다는 계획도 세운다.

영알못인데 영어도 좀 해 둬야겠지.


즐거워졌다.

행복해졌다.

씩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평소에 얼마나 무표정으로 살았던가를 새삼 깨닫는다.


쌓인 잡동사니 때문에 갑갑했던 마음이

노란 바나나가 둥실둥실 떠가는 노란 풍선처럼 들끄게 했다.

쌓인 잡동사니,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건만 단 몇 분만에 마음의 기쁨과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잡동사니에서 여행을 꿈꾸기까지 어떤 힘이 작용한 걸까.

이 마음이란 녀석은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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