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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Sep 15. 2023

느림의 미학

뭉근한 맛, 좋아하세요?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잠시 비가 든  작은 골목에 풀냄새가 얼핏 스며 있습니다.

상가와 주택이 함께 있는 작은 골목길 끝,  의외의 공터가 나옵니다.

건물 자리였을 법한데 헐어내고 텃밭으로 가꾸는 모양새입니다. 제법 큰 땅에 추석을 앞둔 가을이 영글어 갑니다.

골목을 경계로 진 초록 철망너머로 팥덩굴이 뭉게뭉게 넘어오고, 덥수룩한 고구마 덩굴로 뒤덮여도 잘 타진 고랑이 한눈에 보입니다.

작물 위에 더해진 비가 흙냄새와 섞여 들숨에 들어옵니다.


시간 절약과 두 손에 가해지는 가방 무게를 핑계로 짧은 길도 차를 이용하곤 했는데, 조금 힘을 내어 두 발로 걸으니 생각지도 못한 기쁨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도시 속 작은 밭 너머의 끝자락엔 철망을 경계로 진짜 아무 손도 타지 않은 손바닥만 한 공터가 나옵니다. 공터라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덩굴식물들이 엉키고 설켜 초록 더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선한 원두에 뜨거운 첫 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뜸을 들이면 살살 부불어 오르는 모습처럼 초록의 덩굴더미가 부풀어져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별처럼 예쁜 꽃송이들 군데군데 있습니다.

낮에 뜬 별입니다. 나팔꽃이나 메꽃 종류인듯한데 손톱만 한 빨강의 꽃입니다. 요 앙증맞은 빨강의 이름은 무엇일까? 누가 이곳에 꽃을 심었을까? 바람에 날려온 씨앗이었을까?

낯선 빨강의 꽃은 아마도 근자에 키우기 시작한 해외 화초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공터에 자라고 있지만 눈에 익지 않은 꽃이기 때문입니다.


도서관 걸어가는 길이지만, 빨강별꽃을 찾아볼 생각이 없습니다.


요즘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AI를 자주 이용합니다. 궁금한 것을 넘어 개략을 짤 때도 AI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AI가  거시적 도구를 제시해 주면 그것을 토대로 개인의 미시적 안목이 더해지는 구도입니다.


꽃의 이름을 찾는 일은 네*버가 해줍니다.

찾은 꽃의 이름을 가지고 AI에게 물어봅니다.


"깃털유홍초'

'깃털유홍초가 뭐야?'라는 문장을 완성할 필요도 없습니다. 질문이 입력되자마자 좌라락 답변이 나옵니다.

깃털 유홍초는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로서 열대아메리카가 원산이며, 잎이 빗살처럼 완전히 갈라지며 열 편은 선형이고 좌우로 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꽃은 7~8월에 홍색 또는 백색으로 피며, 둥근 잎유홍초와 구별됩니다.


도서관 서가를 뒤적이며 꽃 이름을 찾는 시간 예측 어려운 물음에 대한 답을 단 몇 초만에 제공해 줍니다.


메꽃과 친구구나. 한해살이 덩굴식물이구나. 부푼 빗살 잎의 덩굴이 네 몸이었구나. 너의 고향은 열대아메리카구나.

지식과 소통의 경계도 자유롭지만, 동식물의 교류 또한 훨씬 자유습니다.


빨간 꽃을 머릿속에 연상시키며 물음표 잔뜩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디잘게 갈라진 선형의 잎이 딱 깃털모양이라 '깃털유홍초'가 되었으리라 짐작 갑니다.


요 이쁘고 앙증맞은 꽃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알게 된 기쁨보다 조금 천천히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듭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은 서가의 책장이 도미노판처럼 서 있고,

도서관 분류표의 숫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찾고자 하는 자료가 있을법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회, 과학 분류로 가다 보면 철학도 지나고 사회 과학을 넘겨  보면 언어, 미술, 예술도 보이고, 책장에 도열된 책들의 모양과 제목을 따라가다 보면 문학 역사에 이릅니다.


도서관을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온 호기심을 방사형으로 뻗쳐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흥미로운 제목과 표지를 가진 책이 많았나 싶죠.


세상에는 불문율처럼 보편적인 지혜들이 있습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잊힌다.'도 그중  하나입니다.


편리함과 즉시해결에만 전전긍긍하지 말고,

물음표가 무르익을 때까지 도서관 서가를 배회하고, 찾고자 하는 물음을 찾다 곁길로 새어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길을 책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자주자주 맛보고 싶습니다.


이거 참 좋은데,

진짜 좋은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해봐야만 아는 기쁨입니다.


물음표에 대한 AI가 주는 답을 첨가물 많이 든 음식이 주는 첫맛의 강렬함이라면,

서가를 뒤적이며 찾아낸 책과 시간이 주는 답은 뭉근하게 매력적인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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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며 깃털유홍초가 많이 궁금하셨죠.

마음껏 상상한 모습이 사진과 닮았나요?^^


깃털유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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