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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Oct 12. 2023

빈틈,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창조와 파괴

힘이 빠지고 한층 부드러워진 햇살이 거실 한 켠을 밀고 수욱 들어온다.

나는 오후 4시의 이 빛이 싫다.

마음껏 무력해지고 싶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겨울로 가는 오후 4시의 햇살처럼 무기력해진다.




사그라짐


그물그물 시들기 시작하는 텃밭.

초록의 힘을 빼기 시작하는 호박 덩굴들, 다 익지도 못할 아기 고추를 맺고, 늦은 꽃을 피워내는 팥덩굴의 어리숙한  꽃까지.

이내 다가올 추위와 서리에 말라비틀어져버릴 것들.



엄마의 삶은 빈틈이 없다.

이건 삶이 팍팍하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근육불거진 건장한 남자처럼, 8월의 햇살을 담뿍 담아 빨갛게 익은 고추들을 따내고 나면 고추밭은 한창 축제가 끝나고 텅 비어버린 축제장의 쓸쓸한 분위기만 남는다.

헐빈해진 고랑을 따라, 고춧잎파리와 아기 고추를 톡톡 따는 엄마의 등과 머리 위로 고추잠자리 앉았다 날았다 한다.

곧 서리가 내리고 추위에 못 이겨 말라비틀어져 아궁이의 불쏘시개로나 쓰일 가을의 고추밭에서 엄마는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연다.


바람이 더 차지기 전에 서둘러 딴 고춧잎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낸다.

데칠 때 살짝 넣은 소금이 만들어낸 초록이 참으로 선명하다.


새끼손가락만 한 아기고추들의 꼭지를 딴다.

꼭지를 때내면서 의도적으로 살짝살짝 고추 속으로 연결된 숨구을 만들어낸다. 고추 속까지 양념을 배어들게 뾰족한 도구로 구멍을 만들어야 할 수고를 덜어내는 행위다.

깨끗한 물에 두어 번 헹구어 내고,

물기가 남은 고추에 밀가루를 얇게 입힌다.

찜기를 이용해 고추를 찐다.

보글보글 김이 올라오고 집안 가득 초록의 냄새가 퍼진다.

간장, 참기름, 다진 마늘을 넣고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장 볼로 한 김 빠진 고추를 넣어 골고루 묻혀낸다.



고춧잎나물 무침과 고추 찜


김장 때 쓸  빨간 고추를 수확해 내고,

10월의 나른한 고추밭에서 엄마가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남겨진 고추나무는 서리를 맞고 사그락거리는 가을빛에 더 바짝 마르기를 기다린다.

후에 바짝 마른 고추나무는 뽑혀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된다.


움이 트고,

키가 크고 가지를 넓히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남기고

고추나무는 아낌없이 주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강렬한 왔다감이다.


엄마의 살림에서 일회용은 더 이상 일회용이 아니다.

고추밭에서 고추의 쓰임새를 찾아내듯,

엄마는 모든 물건에서 본래 목적이상의 쓰임새를 찾아낸다.

산업화와 대량생산은 시간과 삶의 소용되는 물건들의 풍요를 제공해 줬다.

그런데, 남은 시간을 이용해 내가 하는 일이란 지구에 지우지 못할 흔적들을 남기는 일이 대부분이다.


더 사고, 더 흔적을 남기고.


사람 사는 일이 고추나무 왔다감 같으면 얼마나 좋으려나.

그렇다면 어느 영상에서 본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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