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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대한 단상

고차원적이어서 고차원적 행동을 하는가, 고차원적 행동을 해서 고차원적이

by slow snail

책을 읽는다.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문자 해독을 하는 행위는 중력을 반하는 행동이며 최상위 고차원 행위라고 어딘가 적혀 있던걸 읽었다.


매튜 법칙이 또 한 번 작동을 한다.

문자해독을 하는 고차원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고차원의 행위를 인지하고 지속적인 고차원 행위를 이어간다.


단지 고차원 행위라서 문자 읽기를 계속하는가. 문자 읽기를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단어로 조합된 한 줄의 문장이 때로는 온 우주를 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고차원적 행위라서가 아니라 경험에 의한 책 읽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문자 읽기의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생각 데자뷔'를 경험한다. 내 머리를 점유하던 단상을 카피하듯 써 내려간 타인의 문장을 경험한다. 전율이 일어난다.

'아....'

경외감과 내가 썼어야 할 문장을 먼저 내뱉어 버린 앞선 자에 대한 질투 비슷한 감정이 올라온다.


"뭐야, 나도 쓸만한 문장이잖아."


그렇다. 분명 내 생각과 일치하는 문장을 기가 막히게 써놓은 앞선 작가의 문장 앞에 망발을 한다.


"내 생각을 이 사람이 먼저 써버렸네!"



김영민 작가의 글 중 현대 미술에 관한 짧은 소설이 떠오른다.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어느 작품 앞에서 '저게 예술이면, 나도 하겠다!'라는 망발!


누구도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 이름 붙여 작품으로 만들 생각의 벽을 넘지 못했을 때, 누군가는 가볍게 벽을 넘고 흔하디 흔한 남자 소변기를 예술의 세계에 옮겨 놓았다잖아. 바로 그게 예술이라는 거야!!



흥!! 개뿔!!!


내속에는 은근한 반골의 피가 끓는다.

내 속에 끓는 반골의 피와 같은 혈액형의 문장들을 만나다.

반골의 문장 앞에 다시 반골의 막말을 한다.


문장은 나를 흔들어댄다.

반골같이 삐딱하게!

그럼에도 먼저 세상을 품은 문장을 써 놓은 앞선 자에 대한, 결국은 그 앞에 여러 종류의 존경심을 표명하게 한다.


흔해빠진 사물을 예술의 세계로 만든 예술가,

무형의 삶을 문장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유형의 형체로 만들어낸 작가,

그들 모두는 나의 선생님이다.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들이여,

2025년에도 많이 배울 수 있게 아량을 베풀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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