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시를 읽어요

간 큰 남자의 간은 사랑일까

by slow snail
지금, 봄볕에 깨어나는 경작지 위에서 늙은 농부들은 흙을 주무르고 있다. 마늘밭과 봄동밭과 시금치밭에 김을 매고 있다 부부가 함께 일할 때, 늙은 부부는 이쪽저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일한다. 늙은 부부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지만,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 돌아갈 때도 남편이 앞서고 아내는 몇 걸음 떨어져서 뒤따른다. 그들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단계를 넘어섰거나, 아니면 소통되어야 할 의사가 이미 다 소통되어버린 것 같았다.
- 김훈의 자전거 여행 1 -

부부


함민복


긴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 속 글의 한 단락은 함민복 시인의 부부를 떠올리게 하고,

함민복 시인의 부부는 자전거 여행 속의 이 글을 떠올리게 한다.


스물 언저리에 만나 여든에 가깝도록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해로한 부모님의 늙은 뒷모습과, 15년을 살아낸 우리 부부의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두 분의 밭농사 일은 자식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밭고랑을 타고 긴 밭고랑에 검은 비닐을 씌워야 하는 협동작업이 필요한 일 앞에서 두 분은 아옹다옹 서로에게 '이래 해라 저래해라' , '말끼를 못 알아듣는다' 등등 서로를 탓하는 가운데 밭고랑을 검은 비닐고랑으로 만들어갔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중년답게 부부가 되어 산 기간도 중년스럽다. 무까끼 한건 아닌데 애살 스럽지도 않은 우리 부부는 지금 각자의 어깨에 놓인 짐들로 인생최대의 고갯마루를 넘고 있다. (기준은 지금까지...^^;;)

치매로 돌봐야 하는 부모님, 머리 굵어져 가는 자녀, 훅훅 목돈 들어가는 경제적 구조 등등. 우리 부부의 장르는 현재 고난과 역경의 대하소설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 밀착육아라는 일을 벗으니 곧 체력저하(노화라는 말은 극구 사용을 미루고 싶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혈액 검사 결과는 각종 성인병의 문턱을 밟고 있었고,

나는 두꺼운 피하지방의 두께가 무색하게 빈혈과 어지럼증을 동반한 메스꺼움으로 상쾌한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의학용어 헤파토메갈리(Hepatomegaly)는 간 비대증을 가리키는 용어다. 나의 남편은 현대시대 보기 드문 간 큰 남자다. 나의 사회생활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세탁기, 오븐 등 가사에 관련된 가전제품의 작동방식은 아예 모르는 남자다. 재활용 분리수거장이 어디 있는지 아는지 알 길이 없고, 반찬통은 뚜껑을 닫아야 한다는 걸 아는지도 알 길이 없다.


유독 장기간 지속되는 어지럼증으로 필수활동 외에는 누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배달된 택배상자를 정리하는데 정체가 묘연한 진공포장된 덩어리가 하나 나왔다. 대왕 문어 같기도 했지만 보기에 좋지가 않았다. 배달 라벨을 보니, 순대재료와 내장 부산물들이었다. 당황스러워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주문을 잘못한 거 같다고.

설명을 들은 남편의 대답은 제대로 온 게 맞단다. 나의 빈혈치료를 위해 간을 주문한 거라고 했다. 퇴근해서 요리를 할 테니 그냥 두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물건을 정리하면서 웃음이 났다. 생전처음 보는 날것의 간을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무엇보다 날것을 본 나는 그것을 먹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한 남편이 부엌에서 부스럭부스럭 거린다. 주방에 비린내 범벅을 해놓을까 봐 염려스러웠지만 지켜보는 게 불안해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달그락달그락, 또도도도 가스 불 켜는 소리, 김이 내뿜는 훈기,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한참 후 가족을 식탁으로 부른다. 생각과는 달리 제법 먹음직스럽게 삶아낸 내장들이 가지런히 잘라져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맛소금과 쌈된장으로 간을 맞춰 먹어보니 사 먹는 거랑 다를 바가 없었다.

엄청난 양의 간을 먹어서였거나 현대의학의 힘을 빌려서였거나 두 가지 중 한 가지의 결과로 다행히 어지럼증은 한결 좋아졌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은 시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이론상 맞지만, 현실은 서로 부딪히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싸움만 안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을 이유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이론은 피곤을 잔뜩 입은 몸의 예민함만 더 극대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과 신뢰는 표현하는 쪽이 더 낫다고는 하지만, 우리 부부의 사랑은 짠하다. 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아려오는 마음. 이게 나의 사랑이다.

그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가보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우린 지금 간절히 서로에게 이 무언의 바람을 전하고 사는 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