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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Apr 19. 2016

봄이면 분홍꽃 흐드러지는
벚꽃 신사라 불러다오

히라노신사 · 平野神社




겨울을 저만치 밀어내버린 춘풍에 사부작 날리는 분홍빛 벚꽃잎. 

손 닿지 않는 허공에 꿈처럼 늘어진 시다레자쿠라枝垂れ桜

아아, 난 이번 봄에도 교토에서 벌어질 벚꽃 난장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회색빛 구름이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아침, 여린 빗방울을 맞으며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교토시 기타구에 위치한 히라노신사平野神社다.

히라노신사는 일본의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平安京(현재의 교토)로 옮기고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열었던 간무텐노桓武天皇(재위 781~806) 어머니의 조상신을 모신 사당으로 나라 헤이세이궁平城宮에 있던 것을 천도와 함께 옮겨와 세웠다고 알려진다. 간무텐노의 어머니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는 백제계 왕족이었으니 이곳의 신들은 모두 백제계인 것이다. 헤이안 시대에 쓰인 <제초지袋草紙>에 남아있는 기록대로라면 히라노신사의 가장 중요한 제신인 이마키신今木神은 백제 성왕聖王을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헤이안 시대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오래된 유적지이며 일본 왕실과 깊이 연관된 칸페이타이샤官幣大社임에도 지금은 그 내력을 가급적 일반인들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아담한 규모의 히라노신사를 현재의 명소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벚꽃이다. 경내의 절반을 차지한 벚꽃 정원에는 60여 종 4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있어 매년 봄 장관을 이루는터라 사람들은 이곳을 '벚꽃 신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헤이안 시대의 가잔텐노花山天皇가 직접 벚나무를 식수하기도 했다니 그 내력도 참 아득히 길다. 


그런데 어째서 벚꽃이었을까. 먼 옛날 히라노신사와 깊이 관여되었던 누군가 특별히 사랑했던 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섣부른 추측은 ㅡ 동화 속 봄 풍경 삽화의 형태로 머리 속에 피어올랐다 홀연히 흩날려 사라졌다. 확실한 건 이곳에 가득한 벚꽃조차 옛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유산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계절의 숨결은 돌멩이처럼 굳어 있던 벚나무 몽우리를 간지럽혀 활짝 깨워놓았다.

행여나 너무 일찍이라, 혹은 너무 늦어 허탕을 치지 않을까 초조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각기 자신의 때가 있듯이 60여 종의 벚나무는 똑같은 봄 온도에 서로 다른 속도로 반응하며 색도 모양도 미묘하게 다른 벚꽃을 피워낸다. 어떤 벚나무는 이제 막 수줍게 몽우리를 터트렸는가 하면, 어떤 벚나무는 농익은 꽃잎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었다. 


봄바람 불어와 꽃가지를 흔드니 나는 졸지에 봄비에 꽃비까지 맞는다. 

이것은 내가 그토록 바랐던 봄의 세례 아니던가. 애잔하리만치 아름다운 봄이다.










아직 세상 사람들의 일과가 시작되지 않은 이른 시간부터 꽃구경 나온 사람들은 아침의 고요를 깨지 않으려 목소리를 낮춘다. 몇 시간만 지나면 정원 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가판에서 음식과 술을 팔거나 사 먹는 사람들로 제법 시끌 법석 한 축제 분위기가 될테지.










봄의 아취가 충만한 뜰에 가만히 앉아 고요를 음미하는 시간. 

춘풍에 흐부끼는 시다레자쿠라처럼 살랑이는 마음의 결을 느끼며 교토의 봄과 또 한 번 내통한다. 

느슨한 봄바람에 날려온 벚꽃잎을 사풋이 주워 올려 곁에 둔다. 손톱처럼 작고 비단처럼 고운 꽃잎마다 우주의 섭리가 숨어있다. 피었다 지고야 마는 생


소금에 절인 벚꽃 사쿠라즈케桜づけ를 따뜻한 물에 띄워 차로 마시는 사쿠라유桜湯도 히라노신사의 명물이다. 걸상에 앉아 따뜻한 사쿠라유를 마시는 동안에는 아직 쌀쌀하게 와 닿는 날씨조차 기분 좋다.










아, 나는 이 행복을 느끼고 싶어 교토에 왔지.




교토에서 즐기는 벚꽃놀이花見는 단지 만개한 꽃을 눈으로 감상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교토의 벚꽃놀이는 그 꽃을 먹는 것으로 온전해진다. 나는 사쿠라유桜湯와 함께 '히라노의 밤벚꽃平野の夜桜'이라는 이름의 사쿠라양갱桜羊羹을 맛보며 다시 찾아온 봄을 자축했다. 



어떤 일에는 장소가 무척 중요하다. 몇 해 전에 사쿠라즈케를 집에 사 간 적이 있다. 분홍빛이 선명한 벚꽃 절임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집에서 만들어 먹는 사쿠라유는 그저 짠 소금물일 뿐이었다. 결국 잔뜩 남아버린 사쿠라즈케를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지 몰라 '국에 넣어볼까, 숭늉을 끓여 넣어 먹어볼까' 고민만 하다 못쓰게 되어 버렸다.



사쿠라유가 풍류風流가 되는 건 봄바람 불어오는 곳에서 벚꽃놀이를 즐기며 마실 때뿐이다. 

그리고 그 장소가 교토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나는 벚꽃 한 송이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음미하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교토의 봄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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