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이듯 계속해서 쌓여가는 것들.
이 글은 제 네이버 블로그인 "실레의 글창고"에 있는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링크 : https://blog.naver.com/kuksc8513/224225727914)
책의 내용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설국은 첫 문장이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저 문장 하나가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표현은 해가 져서 어두워진 장소에 눈이 쌓여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표현들 중 가장 간결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느껴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아시아 2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설국은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줄거리는 큰 특징이 없다. 주인공 '시마무라'가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으로 여행을 가서 그 곳의 게이샤 '고마코'와 고마코의 연적과도 같은 존재인 '요코'에게 느끼는 감정선이 주된 내용이다. 큰 특색없는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문장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기차의 창은 바깥의 풍경과 기차 안 요코의 얼굴을 동시에 비춘다. 시마무라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소설은 '중첩된 세계'를 자주 표현한다.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창을 통해 눈과 불빛이 겹쳐지며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기차의 창문 하나로 이렇게 아름다운 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구름이 끼어 응달진 산과 아직 햇살을 받고 있는 산이 서로 중첩되어 음지와 양지가 시시각각 변해 가는 모습은 왠지 싸늘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날 밤은 눈이 아니라 싸락눈이 내린 뒤 비로 바뀌었다."
소설에선 중첩된 무언가가 자꾸 등장한다. 모순된 무언가가 겹쳐지는 그 순간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게이샤인 고마코는 타락하면서 순수한 존재다. 고마코의 사랑은 파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모순'을 나타낸다. 모순이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이 겹쳐진 것이다. 소설 속 자꾸 등장하는 '중첩에 관한 표현'은 무의식 중에 모순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마무라는 산의 흰 꽃을 보고 감동에 젖었다. 하지만 싸리꽃인 줄 알았던 은빛으로 반짝이던 그 꽃은 억새였다.
멀리서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거칠고 사나워 보인다.
이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가장 빛나는 상상을 하며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을 향해 가는 길은 순탄치 않은 법이다. 험난한 길을 지나 꿈에 다다르더라도, 처음에 상상하던 무언가와 다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짧고 밋밋하다. 다른 고전소설처럼 줄거리나 인물간의 대화 등에 심오한 비유나 상징이 들어있지도 않다.
결말부분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추운 지방 소녀의 뺨의 홍조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게이샤다운 살결 위로 달빛이 조가비 같은 윤기를 보태었다."
이 문장은 모순된 무언가가 겹쳐지는 표현이 아니다. 달빛이 소녀의 살결 위에 윤기를 보태었다.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이 겹쳐진다. 눈이 쌓이듯 아름다움이 쌓이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은 계속해서 무언가가 쌓여나간다.
시마무라는 요코와 대화를 하며 요코에게 매력을 느낀다. 요코에게 매력을 느끼며 고마코에 대한 애정이 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처녀와 도망치듯 돌아가 버리는 것은 고마코에 대한 지독한 사죄의 방법일 듯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어쩐지 형벌 같기도 했다."
시마무라에겐 고마코와 요코의 존재도 묘하게 중첩된다. 마지막에 화재로 인해 요코가 2층에서 떨어지고 고마코가 요코를 감싸안음으로써 그 둘은 물리적으로도 겹쳐진다. 요코는 시마무라에게 동경의 대상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다. 또한 고마코와 요코는, 시마무라가 아닌 '유키오'라는 인물과 엮여있는 연적과도 같은 사이다. 아름다운 요코는 스러지며 고마코와 겹쳐진다.
이 기이한 인연들은 눈의 고장에서 서로 겹쳐지며 '고마코의 일기'처럼 열정적이고도 허무하게 끝이 난다.
이 이야기는 아마 우리 모두의 인생과도 겹쳐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생은 좋고 나쁜 모든 사소한 것들이 설국의 눈처럼 쌓여가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