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롱패딩에서 벗어나 코트를 입어도 될 거 같은 날씨가 연이어지자 비상이 걸렸다. 올겨울 평양냉면을 아직 게시하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 겨울이 끝낼 수 없다는 판단에 친구 A를 평양냉면집으로 소환했다. 둘이 국물 한 숟갈을 뜨는 순간 눈빛을 주고받고, 친구 A는 우렁차게 소주를 시켰다. 한가로운 주말 낮술은 친구 A의 수다도 기분 좋게 들리는데...
“캬~ 평양냉면엔 역시 소주지. 희한한 조합이야. 아 맞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너 기다리면서 책을 읽었는데, 아니 글쎄, 독일 데카당 문학이라고 신간이 나온 거야. 데카당 문학이 뭐냐고? 사회의 도덕을 무시하고 아름다움과 쾌락만 추구하는 타락한 문학이라 해야 하나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이야기가 많은 거 같아. 주로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문학이라더라고 하더라고. 독일 데카당 문학은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해서 샀는데, 참나! 아무리 시대와 나라마다 ‘타락’의 정의와 정도가 다르다지만, 독일 놈들! 이걸 가지고 데카당이라 부르냐 싶더라고. 밍밍한 게 오히려 점잖아 보이기까지 하더라니깐! 그러고 책을 덮었는데, 아니 웬걸 밍밍하니 슴슴한 맛이 계속 생각나서 다시 책을 펼치게 되더라고. 아 평냉같다고나 할까. 처음엔 실망했다가 이후에 계속 생각나는 그 묘한 중독성. 카이절링 소설이 딱 그랬어! <하모니>라는 단편이 특히 좋았는데. 아내 안네마리와 남편 펠릭스 간의 갈등이 주요한 사건이야. 안네마리는 귀족의 품위를 철저히 지키는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펠릭스는 자유로운 사람이라 그런 아내의 태도를 답답해하고 둘 관계가 삐걱대. 역시나 서로에겐 따로 애정하는 상대가 있지. 대충 어떤 스토리인지 감이 오지? 근데 이 소설의 또한 주요 매력 포인트는 아름다운 묘사가 아닐까 싶어. ‘빛은 커다란 왕관 모양 조명의 크리스털에 부딪혀 깨지면서 벽에 작은 무지개 조각들을 뿌렸다.’(p.27) 이 문장에 홀딱 반했잖아. 특정 색깔이 도드라져서 지면을 뚫고 나오는데 뭐랄까...옅은 색상의 배경에서 원색 몇 개만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느낌이랄까? 뭐? 뭐라는지 모르겠다고? 아니 진짜 읽어봐야 해! 분위기가 스잔하면서도 아름다워. 너도 피가 낭자하니 아련한 시대극 좋아하니깐 취향일 거 같은데 어때어때 빌려줄까...?”
술이 원수다. 오랜만에 마신 낮술에 더욱 쉬이 취했는데, 친구 A가 내 손에 쥐여준 책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분명히 책을 들고 우리는 산책길을 걸었는데 다음이. 다음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책의 반납을 닦달할 친구 A를 생각하니 벌써 숨이 막힌다. 경○선 숲길에서 <파도> 책 보신 분! 제보 바랍니다!
<파도 중 하모니/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홍진호 옮김)/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