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오랜만에 본가에 가니 엄마가 취미 삼아 산길에서 주워 온 밤과 도토리를 손질하고 계셨다. 제발 다람쥐와 청설모의 식량을 뺏지 말라고 잔소리해도 엄마는 조금만 가져온 거라 괜찮다고 유일한 취미인데 혼을 낸다고 오히려 화를 내셨다. 다람쥐가 어르신보다 더 빨리 식량을 쟁여뒀길 바랄 뿐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엄마의 변명에 답답해진 나는 친구 A를 잡고 하소연했는데...
“길에서 줍는 게 재미있긴 하지. 에휴 어른들이 즐길만한 콘텐츠가 없어서 그래. 독서하시면 좋을 텐데. 가을에 책만 한 취미도 없는데 말이야. 근데 내가 밤나무 검색하다가 되게 귀여운 거 발견했다! 아니 독일문학 읽을 때마다 ‘너도밤나무’라는 나무가 되게 자주 등장하거든. 그래서 도대체 어떤 나무인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발견한 건데, 식물명에 ‘너도’, ‘나도’라는 표현이 있대. 비슷한 식물 앞에는 ‘너도’를 붙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나도’를 붙인 데, 자타공인과 자칭의 차이인 거 같아. 유럽에는 너도밤나무가 흔해서 문학작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거든. 제목으로 쓰인 작품도 있는데,
드로스테 휠스호프의 <유대인의 너도밤나무>가 그런 소설이지.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쓰인 작품이라 처음에는 범죄소설로 분류됐었대. 주인공 메르겔은 포악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밤 비명횡사해 어머니와 둘이 살다가 외삼촌의 설득으로 외삼촌을 따라나서며 일을 배워나가게 돼. 어머니와 살았을 때 다정하던 주인공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불법을 저지르는 외삼촌의 영향으로 셈이 빠르고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로 성장해. 어느 날 마을 숲속에서 마을 주민인 유대인이 살해되고, 마침 주인공은 행방이 묘연해지지. 범인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 영주가 발 벗고 나서지만, 성과가 없어. 되레 도망친 주인공은 범인이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해. 추리 형식이라서 재미가 있기도 한데, 작품 속 등장하는 마을의 특징과 다소 불분명한 요소들이 독자가 다양한 상상을 이끌면서 소설을 한층 더 흥미롭게 해. 의문 투성이거든.
숲이라는 요소도 미스테리함을 더욱 가중하는 듯하고 말이야.
이 작가는 늦은 나이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당시 여성답지 않게 ‘남성적인’ 소설이라며 좋은 평가를 받게 돼. 당시에는 남성적인 것이 우월한 조건이라 칭찬이 되었겠지만, 지금의 시선에서는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봐. 문체나 묘사가 다소 남성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여성작가의 시선에서 가능한 묘사와 인물 설정 등이 분명히 있거든. 산길에 떨어진 밤 말고, 소설 속에 작가가 흘린 미스테리를 주워가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작업일 텐데 말이야. 쓰읍 내가 한번 연락드려봐?...”
며칠이 지나고 엄마는 직접 만든 도토리묵을 나에게 보내며 친구 A가 느닷없이 전화가 와서 밤 줍기 대신 독서가 어떻겠냐며 책을 영업했다고 전했다. 엄마는 친구 A의 수다를 틀어놓고 도토리를 열심히 깠다고. 엄마에게 친구 A의 영업은 유튜브 ASMR이었을 뿐이라 친구 A가 안타까웠다.
<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드로스테 휠스호프(이미선 옮김)/ 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