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재미있는 문서작업을 위한 비법이 궁금할 때 독일문학

호들갑 독일문학

by 박효경

호들갑 독일문학 69

- 문서작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비법이 궁금할 때 추천하는 독일문학


오리의 표정만으로도 요일을 추측할 수 있다. 눈은 반쯤 감겨있지만,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오면 금요일, 편두통이라도 있는 듯 한껏 찡그리고 있다면 화요일(오리는 화요병이 더 심하다.) 공허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존재하며, 눈물이 맺힌 듯한 눈망울을 하고 있다면 그날은 일요일이다. 평일 저녁 약속엔 잘 응하지 않던 오리가 눈에 피로는 적당한데 참을 수 없는 환한 미소를 띠며 등장했다. 내일은 금요일은 아니지만 노동절로 하루 쉬는 날이었다...



“아, 티가 났나요? 네, 내일 회사 안 가요. 내일 뭐 할지 고민하다가 퇴근 시간도 놓칠뻔했다니깐요. 내일요? 지난번에 A님이 추천해 주신 책 내용이 흥미로워서 한번 읽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친구를 그리워하며 함께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시작하는 소설이었는데요. 주인공이랑 친구는 되게 다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더라고요. 주인공은 교육열 높은 엄한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자랐고, 친구는 포용적인 어머니랑 살면서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자랐대요. 이 둘 사이에 미국에서 이사 온 말괄량이 여자친구가 합류해 셋이서 말썽도 많이 피우고 그랬나봐요. 뭔가 서사가 막 그려지지 않나요?


17007942301.jpg 포겔장의 서류들이 연재되었던 19세기 독일 잡지 <독일 장편소설 신문>


모범생과 반항아의 우정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녀! 소설 처음에 말한 부고 소식도 여자친구가 주인공한테 보낸 건데요. 주인공 친구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켰는데, 둘이 결혼한 사이도 아니더라고요! 너무 흥미롭지 않나요? 과연 이들은 어떤 관계이며 도대체 여자는 왜 주인공 친구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의 마지막을 지킨 거고, 과연 그는 죽을 때까지 혼자였을까? 과연 19세기 말 독일에 삼각관계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추천해 주신 건 조금 됐는데, 책 제목이랑 형식 때문에 선뜻 손이 안 갔어요. 제목이요? 빌헬름 라베의 <포겔장의 서류들>이었어요. 연말 연초에 쏟아지는 문서작업 때문에 서류라면 질린 바람에, 소설을 서류형식으로 썼다는 게 허들이 되더라고요. 근데 후루룩 봤을 때 찐 서류형식은 아니더라고요. A님말로는 19세기 말 소설이라 당시 독일에선 이성적인 인물과 그 대척점에 있는 인물을 갈등을 통해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변화하는 시민계급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도구인 서류를 선택한 실험적인 시도였대요. 글쎄요. 저는 서류가 과연 가치중립적일까 싶었어요. 아, 나도 흥미로운 얘기를 문서로 쓰는 거면 문서작업이 좀 편해질까요...”



오리가 소설 이야기를 할 때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이 서류 얘기로 넘어오자 곧바로 길을 잃은 듯 초점이 사라지는 걸 보며 마음이 짠했다. 모든 노동자가 충분한 휴식과 보상을 받을 수 있길!



<포겔장의 서류들/ 빌헬름 라베(권선형 옮김)/ 문학동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월루하는 비법이 궁금할 때 참고할 만한 독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