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산행하기 좋은 시기다. 날씨에 따라 해는 뜨거운 적은 있어도 바람은 시원하다. 바람막이 하나만 입어도 춥지 않고 땀이 나도 금방 마르는 정도다. 풍성하지는 않더라도 한 발짝 성큼 봄이 다가와 있다. 새롭게 움트는 생명이 산길을 걷는 우리를 둘러싼다.
그래서 땅 곳곳 잔풀이 나는 즈음에 산으로 간다. 예전에는 모든 계절에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물에 부서지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눈부심이야 마찬가지인가 싶지만, 대신 산행길에는 눈이 아주 시원하다. 산에 들어서면 푸른 식물들이 내뿜는 청신한 기운을 들이마신다. 식물에 대해 친구와 한참을 말한다. 하지만 궁금한 건 이들을 직접 마주할 때뿐이라 - 집에 야생화 서적이 있지만 -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이름은 모르지만 굉장하다, 멋지다, 어쩜 이럴까’ 정도로 대화가 마무리된다. 오르막길이 나오면 당연한 일인데도 적당히 험한 말과 추임새가 번갈아 나온다. 높은 산을 가도 나지막한 산을 가도 똑같이 그렇게 한다. 돌아갈 수는 없으니 배에 힘을 주고 흙과 돌에 발을 디디는 수밖에 없다.
도시의 산에도 오르는 길 듬성듬성 쉼을 위한 작은 공터가 있다. 등산객이 뜸한 날에 그 공터는 쉼보다 더한 것을 준다. 얼마 전 인적 드문 야산의 공터에서는 고요하고 깊은 막막궁산에 들어온 착각이 들었다. 나는 등 뒤로 손깍지를 끼고 숨을 들이마셨다. 나뭇가지 사이로 저 멀리 수북한 아파트가 보였다. 숨을 크게 내쉬자 쿠르르- 하고 새가 울었다. 건강한 부리로 나무의 외피를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산 뒷길에는 유난히 새까만 몸통의 벚나무들이 흰색의 꽃을 매달고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찬바람이 입가를 스쳤다. 시린 눈을 감았다 뜨자 하얀 꽃비가 사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무채색 옷에 꽃잎이 앉았다.
균형 없는 몸짓으로 비탈길을 내려가자 옷에 앉은 꽃잎이 저절로 떨어졌다. 넘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몸의 중심을 뒤로 보내고 역시 배에 힘을 주어 땅을 밟았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등산객들이 빠르게 나를 앞질렀다. 길가로 바싹 붙어 기다렸다. 그러다 흙이든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돌이든 잘못 밟았는지 발이 미끄러졌고 몸이 크게 휘청했다. 눈앞의 굵은 기둥에 손을 기댔다. 몇십 년은 된 굵고 단단한 주름을 가진 나무였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꼭대기에 잎눈에서 생생한 이파리가 피어나 있었다. 바람이 불자 꼭대기의 이파리가, 구름과 하늘에 가장 가까운 그것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이파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겨우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를 써 자신을 준비하고, 봄이 다가오면 기대감에 차 눈을 내미는 이파리가 되고 싶다. 4월이 되면 녹색의 잎을 틔우고 햇볕을 쬐며, 비에 축축이 젖어 싱싱하게 곧은 몸을 펴내는 여름의 이파리로 피고 싶다.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홍당무보다 더 붉게 물들고, 추위가 찾아오면 혹시라도 떨어질까 꼭 붙잡았던 가지를 미련없이 놓고 아래로 떨어지고 싶다. 낙엽이 되어 흙으로 스러지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감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텅 빈 맘을 호리는 화면들에게 시간을 내어주느라 골똘히 헤아릴 틈이 없다. 그것들에게 화를 내야 할지 감사해야 할지 헷갈리는 생활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만 상상한다. 꽃도 모르고 나무도 모르면서 이름만 물어대고, 산에 올라 아래만 내려다보고 위는 가끔만 살피면서 상상을 한다. 가장 높은 이파리를 보며 나를 생각한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야산의 가장 낮은 곳인 진달래 동산을 코로나19로 통제한다는 현수막이 가득 붙어 있었다. 통제선 아래 진달래는 이미 진분홍으로 땅을 물들였지만 해와 바람만이 꽃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사람의 손길, 발길이 닿지 못하는 동산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나도 그들과 같이 고요를 견딜 줄 아는 생물이 되었으면 한다. 삶의 뒤켠에 숨은 고요를 끌어안고 매일 밤 잠들기를 바란다. 가장 높은 이파리로 거창하게 살면서 죽고 싶다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