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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hmitz cabrel Nov 08. 2024

죽어서 방울토마토가 되어볼까



월요일 오후, 서촌 거리를 걷다가 문득 생각 났다. 습관처럼 떠오르는 말, 죽고 싶다. 

밖으로 내뱉어 본다. 죽고 싶다. 그러다 내가 사람들이 거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머릿속으로만 되뇌인다. 죽고 싶다. 이 문장이 내 속내에서 노닐던 언어를 건져 올린다. 


죽어서, 뭐가 되어볼까. 은빛 세단이 평일 서촌의 한적한 도로를 지나가고, 벙거지 모자를 쓴 사람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당근이 되어볼까. 아냐. 방울토마토가 되어볼까. 방울토마토 중에서도 대추토마토가 짭짤하니 맛있다. 하지만 대추처럼 기다란 모양보다는 보름달처럼 둥그런 게 나을까.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될래, 라는 질문에 언제나 산자락에 앉은 바위 아니면 우거진 숲속의 나무라고 답했던 내가 왜 갑자기 채소가 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근보다는 방울토마토에 마음이 갔다. 둘다 맛있지만 방울토마토쪽이 생기있고 명랑한 느낌이다. 한산한 주택가에 자리한 독립서점에서 책 2권을 사고 나오니 마음에 활기가 돌았나보다. (흰 고양이 하나, 검은 고양이 하나가 나오는 그림책과 보르헤스가 모은 꿈 수집서를 샀다.


동그란 방울토마토라면 어떤 방울토마토가 좋겠는가? 바위가 된다면 바로 옆에 냇가가 흐르고 그속에서 실뱀이 헤엄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방울토마토라면 어디에 사는 게 좋을까? 맑은 하늘이 보이는 노지에서 자라고 싶다. (비닐하우스에서 살 확률이 높겠지만.) 흙 속에 묻힌 씨앗이 발아해 싹으로 돋아나고, 노란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를 맺으며, 토마토로서 뜨거운 햇볕, 시원한 바람, 우수수 내리는 빗방울을 느껴보고 싶다. 토마토의 방식으로 빛을 감지하고, 물리적 자극을 통해 튼튼해지고, 하늘과 땅을 알아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줄기를 뻗어나가며 세상을 감각하고 경험해보고 싶다. 


만약 전생이었던 인간의 기억을 가진채 토마토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토마토인 걸 만족해할까? 다시 인간이 되고 싶어 어쩔 줄 모를까? 후자라면 난감하다. 어쩌면 전자일지도 모르겠다. 토마토라면 토마토가 사는 방식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 인간일 때 기억이 있으니 삶의 터전인 자연에 몹쓸 짓을 하는 그들에게 복수할 궁리를 해볼 수도 있겠다. 토마토니까 다른 토마토에게 인간이 우리가 살아갈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전할 수 있고, 다른 식물들과도 소통해서 복수극을 꾸며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게는 영향이 없지만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을 생산하는 실험에 돌입할 수도 있겠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 실험이 성공하면, 인간들은 채소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미량의 독이 든 채소를 먹다가 그 독이 축적되어 서서히 죽어가게 될까.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걸음을 멈췄다. 신기한 건물을 발견해서였다. 2층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근사한 정원이 이어질 것 같은 돌길이 있었다. 이질적인 그 풍경을 가만히 보다 생각했다. 나는 내게 복수하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불타는 복수심이라기 보다 손가락 몇 개로 등을 툭 밀어버리고 싶은, 작은 돌부리에 넘어지게 해서 심하지 않은 정도로 무릎을 깨지게 하고 싶은 복수심. 


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뭘까? 궁금할 때가 많았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미운 건 매일 있는 일이다. 또 싫다고도 생각하고 끔찍하다고도 느낀다. 최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인간종에 관한 혐오로 이어지고, 비관에 휩싸여 죽상을 한 채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내가 나를 싫어하는 마음이 소소해질 때, 나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많이 먹으면 치명적이지만 조금은 먹어도 되는 미량의 독을 품고 있는 방울토마토를 내게 먹이는 걸로 끝날 때, 스스로를 좋아한다는 게 이런 건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서점에서 고양이 만화를 사고 꿈 얘기가 나오는 책을 나를 위해 샀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다. 죽고 싶다는 문장을 입에 올리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다. 하지만 그런 말로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나중에 친구를 만나 돌길로 입구를 장식한 신기한 건물에 들어가봤다. 돌길을 따라 가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2층 카페을 가로질러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다양한 빵이 진열되어 있었다. 거긴 카페를 겸하는 빵집이었다. 신기한 건 그 옆에 이끼가 자라는 큰 바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또 잠깐 황당한 생각을 했다. 인간이었는데 이끼로 다시 태어나서 인간을 증오하는 이끼라면…. 빵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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