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현타
사내엔 직급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내 위치는 막내다. 나이를 막론하고 개발자 경험치 막내로서 나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낙수 하는 가르침을 부단히 배우고 익히려고 애써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수가 내가 구현한 코드 중 한 부분을 꼬집고 왜 이리 복잡하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다시 수정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오케이.
명령어 입력: 단순화
출력: 코드
다시 리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왜 아직도 이렇게 복잡하게 구현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라는 싸늘한 답변이었다.
내 딴에 머리 싸매고 심지어 AI에 의존하지 말라던 그의 따끔한 충고가 생각나 뇌주름이 곱절은 깊어지게 고민한 결과였지만 여전히 그의 눈엔 이해가 알 갈 만큼 복잡한 내 코드였던 것이다.
그 사실에 갑자기 현타가 왔다. 부끄럽고 답답하고 무기력 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쩐지 큰 사발면을 찾아 먹고 싶어졌다. 사발면..
사수를 존경하고 따르던 나는 울컥했다.
그 쉬운 구조 힌트나 주든지
님은 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일하고, 이 코드베이스로 3년이나 일한 사람이고 나는 실무경력 4년 차에 이제 이 코드베이스 6개월 차인데 내가 너처럼 한 순간에 되겠냐? 되겠냐고?
라고 속으로 읍소했다.
내 사수는 퀄리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배울 점이 많고 매번 정성스러운 피드백을 주시니 감사하다. 이런 피드백, 월급 받으면서 얻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때로는 그것이 나를 옥죄기도 한다.
내 능력치가 안되는데 황새를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지고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회사에 나 정도 수준의 경력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느 분야든 모두 최소 경력 10년 차의 시니어들 중에 나 혼자 주니어급인 데다 솔직히 현타도 온다.
(그거 아시나요? 독일은 대학에 진학한 이상, 학업의 길로 가겠다 마음먹었으니 기본 석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박사까지 간다는 사실을? 학사는 어째서인지 명함 내밀기도 부끄러워…)
나이는 다들 내 또래인데, 이들은 이 분야에서 10년이 넘게 전문성을 쌓고 팀을 이끄는 반면 원래 전공과 경력을 버리고 시작한 나는, 23-4살 사회 초년생 때 입에 달고 살던 ‘수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잘 모르겠습니다’, 하던 말을 삼땡살이 되어서도 하는 꼴이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고 서글퍼졌다.
아무리 직급이 없어도
아무리 수평문화라도
능력치와 비례하는 사내 권력 사회에서 나는 어쩐지 늘 쭈굴 감자가 되는 기분이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나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다.
어느 날 오후, 씻고 거울을 보다 눈물이 났다.
멘탈이 털리고 콩벌레처럼 움츠려 들고 작아진 거울 속의 내가, 안 그래도 라운드 숄더인데 더 말린 어깨의 내가 안쓰러웠다. 거북목은 또 왜 이렇게 심한 건지.
눈물을 뽑아내고 나니 독기가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인정할 것이다.
나는 쭈굴 감자가 맞다.
나는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많다.
오늘의 수치심과 낯 부끄러움이 나를 각성시켜 줄 것이다. 만년 주니어로 남지 않을 것이다. 오늘 또 나를 단련시키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1mm라도 나아지면 된다.
괜한 자격지심으로 미래의 나에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을지어다.
결국 나는 사수에게 머리를 짜내도 여기서 더 간단하게 할 방법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사수는 그 코드 부분을 직접 수정했다.
나로서는 선택지 어디에도 없었던 방식으로.
내 코드 길이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혼자 너무 깊은 고민의 골을 오래 파기도 한다. 때로는 조금 더 일찍 도움을 구하는 것도 나를 위해, 팀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인정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삼땡살 막내는
오늘도 쑥쑥 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