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두려움에서 열두 살 어린이가 계모와 친부에게 학대당하던 끝에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시간 간격을 두고 촬영된 아이의 사진에는 점점 눈의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세상에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다양한 종류의 나쁜 놈들이 있지만,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그중에서도 생전에 어린이와 동물을 학대했던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조금이라도 반격할 힘이 있는 대상 대신 괴롭혀봤자 어쩔 도리 없는 존재들을 일부러 골라서 행하는 최악의 비겁한 패악질이기 때문이다. 블라인드에서 '자살'을 검색해 보면 너무 많은 직장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많은 수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고, 흔히 말하는 좋은 회사 다니는 사람들도 예외가 없다.
회사뿐 아니라 학교, 동호회, 심지어 가족이라도 여러 사람이 부대끼는 데라면 어느 곳에서나 모두가 서로 거슬리게 하거나 부딪히지 않고 텔레토비 동산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갈등은 인간세상에 내재적인 것이고 어디선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라 동료를 불쾌하게 하는 모든 언행이 '직장 내 괴롭힘'일 수는 없다. 아동학대와 동물학대가 천인공노할 범죄라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아직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경각심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직장 내 괴롭힘은 퇴사하면 일단은 벗어날 수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밥줄이 걸린 문제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몇몇 돌연변이 싸이코패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약한 개체를 공격하듯 꿈틀거리기 어려운 처지의 지렁이를 꾹 밟고 싶어 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식욕과 성욕과 배설처럼 강약약강의 본성도 조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명대사가 있고, 그 말에 동의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만 비로소 내가 받을 존중이 담보될 수 있다는 것이 씁쓸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