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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17. 2024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요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필독서는 없다


   독서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사실 질문한 사람이 읽을 책보다 자녀에게 추천할 책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 답하기 난감할 때가 많죠. 질문자가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라면 상대가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평소 어떤 책을 읽어 왔는지 대화하며 적합한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장에 없는 제3자에게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난감하기만 합니다. 상대의 관심사나 독서 수준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에게 맞는 책을 추천하는 것은 신내림이라도 받아야 가능할 일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을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런 책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은 다양하지만 크게 정보나 지식 습득, 사고력 훈련, 인성/감성 함양이라는 세 가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책을 읽는 즐거움 자체가 독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논하는 이 글에서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보나 지식의 습득, 사고력 훈련, 인성/감성 함양이 독서의 목적이라고 할 때 사람들의 목표 지점이 과연 같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정보나 지식의 습득 측면만 보아도 사람마다 가진 지식 수준, 필요한 정보나 지식의 범위와 분야, 깊이가 모두 다릅니다. 각기 다른 지식 수준과 필요를 가진 사람들에게 요즘 이 정보나 지식을 꼭 알아야 하니 어떤 책을 반드시 읽으라고 권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과학 혁명의 구조>나 <정의론>이 훌륭한 책이어도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을 갖추지 못했거나 이 분야에 대한 필요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종이 뭉치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고력 훈련이나 인성/감성의 함양이라는 목적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선택적 독서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어떤 답을 드려야 할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 최근에 읽은 책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몇 가지와 좋아하는 책을 알면 질문자의 관심사선호하는 책의 장르, 독서 수준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연결고리를 찾아 책을 추천합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묻는 분들 중에 최근에 읽은 책이나 좋아하는 책 목록을 품고 다니는 분은 보기 드뭅니다. 오히려 책을 거의 읽지 않는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죠. 그럴 때는 최근 관심사를 묻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도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는 책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 다음 관심사와 연결 고리가 있으면서 읽기 쉽고 재미있는 책 중에 몇 권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책을 추천한다고 해도 반드시 책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찾아 미리 살펴보고 선택하여 읽도록 합니다. 지속 가능한 독서를 위해서는 독서에 대한 내적 동기가 중요한데, 다른 사람이 권한 책 위주로 읽는 것은 내적 동기를 약화시킬 우려가 큽니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부터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매우 큽니다. 따라서 독서에서도 선택권을 보장해야 독서의 효과나 내적 동기 측면에서 유리합니다. 이런 독서지도 방법을 '자기 선택적 독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교사나 부모, 멘토가 손을 놓고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읽기 수준이나 관심사, 분야에 따라 어느 정도의 선택지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함께 가서 책을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지속 가능한 독서를 위해 자기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자율적 독서가 중요하다고 할 때 최근 우리나라의 독서 문화는 우려되는 지점이 많습니다. 특히 유명인, 인플루언서 등이 구매한 제품을 따라 사는 소비 트렌드, '디토(Ditto) 소비' 열풍이 출판계까지 휩쓰는 것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책마저도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의 손을 타야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책이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독자들의 수준이 어떤지를 방증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학생들의 경우 교육과정에 독서교육을 포함하여 학교에서 배우고 있지만, 자율적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배우기 어렵습니다. 아이들 하나 하나의 독서 수준이나 기호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선택하여 읽고 결과물만 제출하도록 방치하거나, 똑같이 정해 놓은 필독서를 읽고 독후활동을 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학교나 교사 차원에서 독서교육에 사명감을 갖고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간혹 있지만 교사들이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공교육의 특성상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학교에서 이러한 독서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서를 갖춘 도서관과 전문 사서 교사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정부에서도 2018년 학교도서관진흥법을 개정해 학교 도서관에 사서 교사 배치를 하도록 의무화했지만, 작년 교육통계에 따르면 전문 사서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15%에 불과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사교육기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학년별로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월별 필독서를 정독하고 토론이나 글쓰기 활동을 하거나,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온오프라인 도서 중에 선택하여 다독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 독서 사교육은 독서 습관을 들이고 독서에 필요한 기능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사교육에만 의존하는 독서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내적 동기를 해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독서 사교육을 받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선택하여 책을 읽을 수 있는 물리적, 정서적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요?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첫째, 자신의 독서 수준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 수준은 나이에 따라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발전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성인이라고 해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자신의 독서 수준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또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 보통은 연령이나 학년에 따라 독서 수준이 점차 높아지지만 개인차가 매우 큽니다. 자신의 독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면 독서 능력 테스트를 받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학생용 테스트는 다양하게 나와 있으니 검색하여 활용해 보시고, 성인용 테스트는 EBS에서 제작한 문해력 검사를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문해력 - 성인 문해력 테스트 (ebs.co.kr)


   자신의 독서 수준을 테스트하지 않더라도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책을 선택할 때 몇 페이지를 미리 읽어 보는 것입니다. 이때, 책 내용을 70% 정도 이해할 수 있다면 선택해도 좋습니다. 근력 운동을 할 때 자신의 근력으로 약간 벅찬 정도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독서를 할 때에도 자신이 100%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책보다 70% 정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는 책을 선택하면 나머지 30%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독서 능력이 발달합니다.


   둘째, 자신의 목적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이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인지, 사고력을 기르기 위한 것인지, 인성이나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것인지 점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광범위한 정보나 지식을 체계적으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책보다 효과적인 매체는 없습니다. 사고력을 키우려는 목적이라면 더욱 다른 매체보다 책이 효과적입니다.


   문자와 영상, 이미지, 음성, 음향효과가 뒤섞여 있는 텍스트를 복합양식(multimodal) 텍스트라고 합니다. 유튜브 영상이나 숏폼 콘텐츠들이 모두 복합양식 텍스트에 속하죠. 이런 콘텐츠는 한번에 많은 정보를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만, 콘텐츠를 보고 듣는 동안 우리의 사고 기능이 활발하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문자 중심으로 구성된 책은 우리가 스스로 이미지를 상상하고 문자로 표현하지 않은 행간의 내용까지 추론하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사고해야 합니다. 따라서 유튜브만 봐도 웬만한 지식과 정보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고력 발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렇게 우리의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사고하기 때문에 인성이나 감수성 발달에도 더욱 유리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요?


   자신의 수준과 목적에 맞는 책을 선택한다고 할 때, 어떤 책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한 책인지 한눈에 알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독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가장 고민했던 부분도 도서를 선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학생이라면 교육적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잡기가 수월했지만, 성인들의 경우에는 독서의 목적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도서의 분야를 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책들을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평가하는 어느 정도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준들을 세우기 위해 저는 독서 전문가나 작가들이 쓴 메타북(책에 대한 책)을 많이 읽으며 공통된 내용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을 갖습니다.


1.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책


   첼리스트이자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는 장한나는 독서광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미문학, 러시아문학, 프랑스와 독일 문학과 철학서를 두루 섭렵했는데, 특히 톨스토이의 전작을 완독했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독서가 음악가로서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는 것과 어떤 작품을 몇 년 주기로 반복해서 읽으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 새롭게 보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책이 있나요?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독자인 나도 성장해야 하고 책도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을 품고 있어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책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독서 고수는 두 번 이상 읽지 않을 책이라면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죠. <이타적 개인주의자>로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정수복 선생은 좋은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책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일시적인 책과 영구적인 책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서 일시적인 책들이 영구적인 책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읽을 때 반짝할 뿐이지 시간이 흐르면 무의미해지는, 재미있는 소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보고 또 보아도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독자들이 늘어나야 그런 책을 쓰는 작가들도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 정수복,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 110~111p


2. 죽비처럼 나를 후려치는 책


   디지털 미디어가 정보를 주고받고 소통하는 주요 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는 방식이 점차 진화하고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나 SNS에 접속하면 개인의 취향이나 관심사에 맞는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큐레이션 방식은 정보의 바다에서 내 취향과 필요에 맞는 정보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낳기도 합니다. 요즘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편가르기, 상대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태는 책 대신 SNS로 정보를 얻은 결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좋은 책은 원래 있던 내 생각과 취향을 강화해 주는 책이 아니라 내 좁은 식견과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선승들에게 내리치는 죽비처럼 잠들려는 나를 깨워 다시 수행에 들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카프카는 이런 책을 '도끼'에 비유했죠.


내 생각에는 사람을 물고 찌르는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할 것 같아.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 정수리를 일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편지에서 썼듯이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 사실 책 없이도 우린 행복할 거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책들을 부득이하다면 우리가 직접 쓸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책들이야. 우리가 뭇 인간들을 떠나 숲으로 쫓겨나기라도 할 때처럼,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과도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좋아한 사람의 죽음과도 같이, 자살과도 같이 작용하는 그런 책들 말이야.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 -1904년 1월 27일 카프카가 오스카 폴라크에게 쓴 편지 중에서


   카프카의 말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라면 책을 대체할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관습, 고정관념, 편향들을 깨부수는 것은 책이 아니면 해내기 어렵죠. 좋은 책은 이렇게 내 양심을 찌르고 감수성을 자극하고 지식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번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책, 죽비처럼 나를 후려치는 책을 몇 권이나 만나 보셨나요?  저도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이런 책을 꼽으라면 30권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는 분이라고 해도 이런 인생책은 아마 1년에 한두 권도 만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인생책이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의미없는 책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만나기 위해 책을 고르고 읽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독자이자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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