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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Sep 11. 2024

9월 초순 독서 일기

   9월부터 학교 생활과 프리랜서 일을 병행하다 보니 지난 열흘 간 숨찬 일정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주 독서 노트는 9월 초 지난 열흘 간의 독서 일기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현재 읽고 있는 책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업무용 도서 2. 전공서 3. 좋아서 읽는 책




1. 업무용 도서


현재 모 회사에서 새로 론칭하는 독서 프로그램 개발 업무에 외주 형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하면서 학생용 워크북을 개발하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프로그램 개발에 필요한 참고 도서들과 커리큘럼에 포함된 도서들을 읽고 있죠. 지난 열흘 간 씨름했던 책은 『걸리버 여행기』였습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 어드벤처 도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편집해서 출간한 어린이용 도서가 더 많지만, 그런 편집이나 독해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은 원전으로 20년 전쯤 처음 읽었는데, 그때 어떤 배신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거인국, 소인국 말고도 걸리버가 갔던 나라들이 더 있다는 사실과 책에 나타난 인간 사회에 대한 냉소가 낯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이 책을 뒤적이면서 올해 2024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가 '후이늠'이었던 것이 떠올라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후이늠은 걸리버가 가장 마지막에 방문하는 나라로 이성적이고 우아한 말(馬)들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고 야만적인 모습을 한 인간 종족 야후는 경멸의 대상인 곳입니다. 도서전의 주제가 후이늠이었던 것은 출판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 일종의 시위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위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에 계신 분들은 이런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지만요.



그가 보기에 우리는 그 역시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우연으로 극히 적은 소량의 이성을 가지게 됐지만, 그것을 단지 우리의 타락한 천성을 악화시키거나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새로운 타락을 획득하는 용도로만 쓰는 동물이다. 또 우리는 자연이 내려 준 극히 적은 능력을 없애 버린 채 우리 자신의 원초적 욕구를 증폭시키기만 했으며, 그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고안물을 만드는 데 평생을 헛되이 쓰는 것처럼 보인다.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스위프트 지음, 이혜수 옮김, 을유문화사


   이 책을 읽다 보면 18세기에 쓰여진 이 책이 인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이처럼 날카롭게 풍자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정말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후이늠들의 평가처럼 타락한 천성을 악화시키거나 새로운 타락을 획득하는 용도 위주로 쓰이는 걸까요? 또 라퓨타 사람들처럼 우리가 현실의 작은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관념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건 아닌지, 불필요한 연구나 기술 개발에 매달려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 외에 교재 개발을 위해 참고하는 도서들도 있는데요 최근 문해력 분야에서 '어휘' 관련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문해력 약화의 근거로 아이들의 빈약한 어휘력을 손꼽는 이들이 많다 보니 어휘력 강화를 위한 도서들이 잇따라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양은 질을 낳는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야의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면 설익은 것들이 많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분야 콘텐츠들의 질이 상향평준화 되는 것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어휘 관련 도서들 중에도 손이 가는 책들이 몇 권 있었습니다. 특히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한 『인생 어휘』는 주문하여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관찰’ ‘경청’ ‘여유’ ‘배포’ 같은 어휘들의 어원은 무엇인지, 어떤 고전과 연결되는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로 만난 책들도 개인적 관심으로 확장돼 다른 책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2. 전공서


   이번 학기부터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일에 개강하여 지난 주에는 강의에 필요한 전공서와 논문들을 찾기 바빴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분야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인문치료'입니다. 독서교육에 대한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책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일 말고 다른 게 없을까 고민하던 중 독서치료, 인문예술치료 같은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오래 전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인문학의 쓸모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이 지식인이나 상류층의 교양학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특히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학문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외부 교화위원으로 1년 6개월 동안 재소자 독서 동아리 지도를 맡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 마음은 있었지만 생업에 치여 잊고 있다가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앞뒤 재지 않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공부라 걱정도 되지만,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과 주말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처지를 요즘 주독야경한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잠이 부족해 약간 삐걱거리는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지난주부터 시작한 수업에서 한 학기 동안 읽어야 할 강의 교재와 참고 도서, 논문들의 리스트를 받았습니다. 주로 서사학, 심리상담과 관련된 텍스트들입니다.



   읽어야 할 텍스트가 산더미지만, 읽다 보면 또 읽고 싶은 책을 불러오는 터라 읽어야 할 전공서 리스트는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어제 발표에서 언급했던 책들 중에서도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도 카트에 넣고 말았습니다.



3. 좋아서 읽는 책


   이렇게 책의 홍수 속에서도 덕질은 멈출 수가 없어 또 책을 사고 읽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열흘 동안 가장 크게 울림을 준 책은 역시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었습니다. 신형철 님의 책은 서문부터 읽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데요, 이 책은 특히 도발적입니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인생이 살아질 것이다.


이 정확한 사랑의 뜻이 궁금하신 분은 꼭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글에서 이 책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 했으므로 여기서 갈무리하겠습니다.


   좋아서 읽은 책 중에 한 권 더 소개해 드리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20년을 살며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에서 글을 써 온 목수정 작가의 책입니다. 파리에서 만난 말들』입니다.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요, 작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지만 문학이나 철학에 등장하는 프랑스어로 된 어휘들을 만날 때마다 참 심오한 뜻을 가진 아름다운 말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34개의 말로 프랑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풀어나갑니다. 그 중에서 저는 기억하기로 한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과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입니다. 모두 타인이나 삶에 대한 태도에 한 것입니다. 이 단어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을 보면 비록 낯을 많이 가리는 목각인형 같은 사람이지만, 마음으로는 이런 사람을 지향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 책은 밀리의 서재로 읽다가 문장들을 이미지로 저장해 두었습니다. 밀리의 서재 기능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기능입니다. 여러분도 읽으면서 잠시 멈추게 되는 어휘가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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