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야성의 부름』을 읽고 나니 벅처럼 듬직하고 멋진 대형견과 함께 살아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벅은 세인트버나드와 스코틀랜드 셰퍼드의 혼혈로 몸무게가 60~70Kg 정도입니다. 긴 털과 단단한 근육을 갖추었지만 밀러 판사의 저택에서는 그저 얌전한 애완견일 뿐이었죠. 그런데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97년 가을 어느날 도박에 빠진 정원사 조수의 손에 끌려가 특급배달 우편물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게 됩니다. 문명의 세계를 상징하는 판사의 집에서 곤봉과 송곳니가 난무하는 세계로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원시 세계 속에서 벅은 점점 단련돼 갔습니다. 근육은 더욱 단단해지고 적은 음식으로도 견딜 수 있게 되었죠.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서서히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추위 속에서 우편물이 가득 담긴 썰매를 끌고 하루 60KM를 달리는 동안 썰매개들은 지쳐갔습니다. 병들어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개들은 숲으로 데려가 가차없이 죽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벅은 놀라운 힘과 끈기로 일을 해냈고 제 힘으로 썰매개 무리의 리더가 됩니다. 금광을 찾아 몰려온 사람들은 인산인해였고 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우편물도 산더미였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추위 속을 달리던 썰매개들은 결국 쇠약해진 상태로 헐값에 팔려나갑니다. 캘리포니아 주의 산타클라라에서 캐나다의 도슨을 거쳐 다시 삼십일을 달려 스캐그웨이까지 왔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 만난 주인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북극을 향해 가는 이들이었죠. 그러나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금에 눈이 멀어 이곳까지 온 그들은 개를 다룰 줄도 몰랐고 험난한 자연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짐은 무거웠고 개들은 지쳐갔습니다. 아무리 채찍을 가해도 꼼짝할 수가 없을 정도였죠. 이때 벅을 구해준 이가 손턴입니다.
손턴은 벅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했고 휴식을 취하도록 해 줍니다. 벅은 손턴에게 다른 주인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열병같은 흠모, 미칠 듯이 광적인 사랑을 느끼죠. 둘은 눈빛으로 대화했고 몸으로 장난을 치며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손턴이 친구들 앞에서 호기롭게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벅은 지체없이 뛰어내리려 할 정도였죠. 손턴을 괴롭히는 사람은 가차없이 날카로운 이빨로 응징했습니다. 게다가 손턴에게 큰 돈을 벌어주었고 그의 목숨까지 구해냅니다. 손턴에게도 벅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된 둘의 사랑은 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에로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이고 절대적이며 충만한 사랑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손턴의 죽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벅에게는 야성의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이죠. 야생의 세계에서 자신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며 살고 싶은 충동이 그 외침의 정체였을 것입니다. 벅은 손턴에게는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동반자였지만 600Kg이 넘는 거대한 사슴을 사냥해 피의 희열을 느끼는 맹수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해츠 족의 습격으로 손턴과 일행은 목숨을 잃고 이에 분노한 벅은 이해츠 족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합니다. 그러나 잔혹한 복수도 손턴을 잃은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늑대들의 습격을 당한 벅은 지혜롭게 늑대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유령 개'가 됩니다. 그 유령 개는 금을 찾아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캠프에서 음식을 훔치고 개를 죽였으며 사냥꾼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진짜 맹수가 됩니다. 그리고 해마다 여름이면 손턴이 살던 계곡을 찾아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다 길고 슬프게 울고 간다는 이야기로 이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잭 런던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자입니다. 가난한 떠돌이였고 온갖 노동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버클리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금을 찾아 알래스카로 떠난 전력도 있었죠. 그러나 잭 런던 같은 이에게 금보다 자연 그 자체가 더 매혹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나 봅니다. 남들이 금에 눈이 멀어 있는 동안 그는 대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 혹독함에 눈을 뜨고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03년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바로 『야성의 부름』입니다. 작가의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이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한의 추위와 골드러시 행렬, 썰매개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귀로 듣고 글로 읽은 것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책을 덮고 나니 유기견들이 산에서 떼로 몰려다니다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주택가에서 음식을 훔쳐가 골치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세계에서 살도록 훈련시키고 심지어 성대를 제거하거나 불임수술까지 시켜가며 길들인 개들을 귀찮다며 갑자기 야생의 세계로 내몬 것이죠. 이 개들은 아마도 벅처럼 야생의 세계에 적응해가며 잃어버린 본능을 되찾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야성을 되찾은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그들을 해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또는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 잭 런던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 삼년 후인 1906년 『늑대개 화이트팽』을 발표합니다. 이 두 소설은 형제관계입니다. 『야성의 부름』이 문명의 세계에 살던 벅이 야성의 세계로 나아가 격렬한 생존투쟁 끝에 혹독한 자연 속에 우뚝 서게 되는 이야기라면, 『늑대개 화이트팽』은 야성의 세계에 살던 개 하이트팽이 잔인무도한 주인 뷰티 스미스를 만나 흉악하게 변했다가 선량한 주인 스콧을 만나 사랑을 매개로 문명 세계에 길들여지는 이야기죠. 줄거리로만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 같지만 저변에 흐르는 문제 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작품 모두 자연과 문명 세계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 주는 책입니다.